보르헤스 그리고...나

거울과 백과사전/Cristine de Lailhacar

알포 2009. 5. 14. 16:33

거울과 백과사전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나타난 보르헤스적 코드


                                            - Cristine de Lailhacar/번역작성: 천필립


I. 거울들의 거울

   나는 씨앗 같은 아이디어에 자극받아, 19783월에 장미의 이름을 쓰기 시작하였다: 수도승을 독살하고 싶었다. 사실, 상당히 씨앗 같은 아이디어는, 장미의 이름에게 붙이는 후기에 공표 되었다.1) 혹자는 아마 라틴 단어 semen (씨앗, 정액)과 그리이스 단어 semeion (기호), 상호텍스트적/발생학적 재생산의 잠재적인 확산을 의미하는, 퍼트린다는 공통적인 기능을 갖는다는 사실에 기초한 데리다의 반논리적인 - 혹은 시적으로 논리적인 - 거짓 어원학적 장난을 상기할 것이다.2)

   이 의미심장한 씨앗에서 자라난 경험적 현실이 원고-자연스럽게 씌어진이라는 설명을 달고 나타난 소설책이다. 에코는 백과사전의 괴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순진한 중세의 연대기 작가라는 가면을 필요로 하였다: 백과사전의 괴물이란, 그 자신의 백과사전적 지식과 실제의 혹은 상상의 도서관에 있는 책들 사이의 상호텍스트적인 반영, 다시 말해, 독자로서의 자기 자신이다. 말하자면, 뱅상 드 부베와 움베르토에 의해 읽힌 정말로 중세적인 같은 원고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삐에르 메나르의 동키호테와 다른 것만큼이나 다른 텍스트이며, 그 이유는 뒤쪽의 독자가, 양피지 위에 새롭게 씌어지는 것처럼 하이퍼-텍스트에 중첩되는 그 모든 텍스트들의 프리즘을 통해, 같은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에 있다.3) 보르헤스가 카프카와 연계시켜 언급했던 것처럼, 모든 작가들은 자신의 선구자를 창조한다. 그러나 순수함이라는 이 가면은 일찍이 있었던 가면의 가면, speculum speculi(또 다른 거울의 거울)이다. 돈키호테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작가는, 이교도들에게 추적당할수록 줄어드는 진실에 대한 믿음을 끄집어내는 금지되고 금지되듯 신비스러운 인물들 속에서 수세기 전에 씌어진 원고의 번역본이자 우연히 발견된, 그 원고의 알리바이에 의지한다. 그 원고의 없어진 부분-의미의 부재-는 비록 존재하는 부분들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더라도 존재하는 부분들만큼은 중요한데, 그 이유는 여기에서 필요성의 논리적 범주-여전히 나타나 있는 것에 대한 필요한 제한-은 가능성, 혹은 speculation(라틴어 speculum, 거울, 혹은 상상, 허구에서 비롯된)의 논리적 범주에게 자리를 양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최초의 원고는 연대기로서는 의심스럽다는 사실 이상의 것이며, 많은 징후들은 그것이 처음부터 허구이거나 거울 이미지거나 speculum mentis(마음의 거울)이라는 생각으로 인도한다. 장미의 이름의 경우, 최초의 발견은 14세기 원고를 쓴 수도승에 의한 성실한 번역본의 발견이다. 돔 아드소 데 멜크의 원고에서 보고된 우주와 사건들에 관한 역사적 재구성을 위한 에코의 장난기 가득한 의도는, 보르헤스가 그 발견을 거울과 백과사전의 결합에 두고 있고, 인간들에 의해 해독될 명에 있는 미로... 체스 플레이어의 엄격함에 의해 만들어진인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의 우주의 재구성과 닮았다 (F.S 13, 35, 나의 강조). 그러므로 장미의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 허구에 관한 허구인데, 그것은 번역본이 사라지고 원본에 대한 어떠한 흔적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코는 스페인어로 번역된 Georgian 원고 원본(모든 함축들은 gruzin [Georgian]이라는 러시아인들이 코드를 형성함으로서 연합되었다)에서의 인용문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알린다. 그는 이 원고를 우연히, 보르헤스적 도시인 부에노스 아에레스에 있는 길거리 책장의 마구잡이식으로 모아진 책들인, 코드화 되어 있지 않은 도서관에서 발견하였으며, 거기에는 체스 게임에서 거울을 사용하는 것에 관하여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체스, 씌어지지 않은 소설의 실마리들처럼 무한히 갈라지는 가능성을 가진 그 게임 중의 게임.

   이 존재하지 않는 허구에 대한 허구인 장미의 이름이 공전의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영화로 만들어졌을 때에는, 무수한 사본이 스크린에 영사되었다는 사실은, 보르헤스의 존재론적 손재주의 훌륭한 예로 보인다. 그 자신에 대해 말하자면, 보르헤스는 일관적으로 환상을 현실로 바꾸고 그의 모든 실제의 혹은 전기()적인 존재를 aleph(알렙)과 같은 번뜩이는 재기 속에서 현실이 아닌 것들로 바꾼다. 기호, 특히 Borges라는 이름과 같은 씌어진 글자 혹은 씌어진 글자들의 배합은, 이미 존재하는 사물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을 대신한다. 보르헤스의 우주-책들로 만들어진 우주-에서 기호는, 궁극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에 선행할 뿐만 아니라 사물을 창조하기도 한다. 사물은 존재하기 전에 반영되었다. 에코의 경우에는, 내가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사물은 현실-가짜 수도원, 북이탈리아에 필름을 상영하기 위해 판지를 사용한 ()구성-에 존재한다. 선행하는 것-우리가 우선 인식하는 것-은 판지 사본이다; 원본은.... 기호학은 사실 그 전도()의 실행이라는 점에 있어서 diabolical(악마적)(그리이스어 diaballein, 건너편으로 던지다, 뒤집어 놓다, 뒤바꾸다에서)이다: 내가 기호로서 인식하는 것은 선행이다; 그 선행에서 내가 추론하는 원래의 원인은 결과이다. 장미의 이름에는, 전통적 질서에 대한 존재론적, 연대기학적, 논리적, 그리고 윤리적 전도들이 보르헤스의 허구들 속에 들어있는 만큼 있다.

   중년의 중세연구가인 에코에게 있어서 무엇이 Liber Mundi(세상의 책), 모든 것이 신성한 책, 신의 기호로 읽힐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14세기의 순진한 베네딕트파 견습 수도승의 가면보다 더 매력적일 수 있었겠는가? 세상의 그러한 이상적인 상태는 보르헤스적인 파괴를 창조하기 위한 이상적인 토대이다.

   알라누스 아브 인술리스(Alain de Lille)의 시구는 일찍이 소설의 화자인 아드소의 스승, 윌리엄 오브 바스커빌(18)에 의해 인용되었으며, 이것은 외각()을 형성한다: 세상의 해석을 위한 하나의 단순한 상호연관적인 코드.


Omnis mundi creatura

Quasi liber et pictura

Nobis est et speculum.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우리에게 하나의 책, 그림, 거울이다.)4)


Speculum은 신학에서 가장 유명한 거울-성 아우구스틴이 성 바울(1 고린도서 13:12)Nunc videmus in speculum in aenigmate, tunc facie ad faciem"(이제, 이 세상에서, 우리는 거울 속에서 진실을 수수께끼로 본다; 그리고는, 다른 세상에서, 우리는 그것을 얼굴을 맞대고 볼 것이다)라고 반영하고 있듯-반영한다. 에코는 이것을 인용하지는 않지만 그의 텍스트를 통해 그 거울의 상호텍스트적인 파편들을 빈틈없이 퍼뜨린다.

   그 소설의 역학은, 추론과 해석의 실용주의이며 코드들의 사용인, 보는 방법(videmus), 기호들을 현재 여기에 있는 거울에서 enigma(수수께끼)로 읽는 방법에 의해 결정되었다.5) 그 소설의 추진력은 하나의 대위법이다: 한쪽에는, 장님이지만 보는 자의 악마적으로 전도된 이미지, 상투적인 문학에서는 언제나 현명하고 옳은 티레시아스적인 인물, 호르헤 데 부르고스가 있다. 그는 교리에 대한 광적인 방어와 그 결과로서의 철학과 호기심에 대한 증오를 대표한다; 다른 한쪽에는, ()-르네상스적 전통에서 해방된 과학자, 로져 베이컨의 사도, 그리고 물론, 우리가 에코의 작품들6)의 구절에 대한 그의 수많은 부연설명에서 추측할 수 있듯,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의 사도인 윌리엄 오브 바스커빌이 서 있다. 바스커빌은 진실(범죄의 진실)에 대한 조사를, 가능한 세계들 중 하나에서 선택된, 그럴듯한 가설을 만들어 냄으로써 시작한다. 이것이 우리가 speculation(추론): 허구에서 그리 떨어져 있지 않은, 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opera aperta(열린 노력)의 정신, 뱅상 드 부베에 의해 인용된 성 아우구스틴에 의해 인용된 성 바울에 의해 인용된 전형적인 에코식 상호텍스트성에서 정당화된 자세로써, 어떤 책들이건 간에, 책들을 읽는 것에 이끄는 것은 (연역법에 기초를 둔) 과학의 가정된 엄격함이다: Quad genus litterarum non cum credendi necessitate, sed cum iudicandi libertate legendum est"(우리는 특정한 책들을 믿음에 대한 무조건적인 수용[필연성]으로써 읽어서는 안 되고, 판단의 자유로써 읽어야 한다).7)


   a. 역사적 거울

   회고적으로 중세는 기호학자들에게 있어서 황금기이다. 그것은 단칭()적인 의미, 그리고 표의와 그 위기의 극점을 대표한다. 미덕은 창조적, 혹은 비판적인 생각까지(지적 교만이라는 죄) 배제하는 것을 지향하고, 오직 이미 씌어진 것만을 존경하는, 복제하는 듯한 수도승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에코에 의해 선택된 중세 후기는 아우구스티누스주의(오늘날 누군가가 보수적이라고 부를 듯한)와 토마스주의(오늘날 누군가가 통합주의적인 경향들에 의해 오염된이라고 부를 듯한) 사이의 분쟁으로 분열되었고, 그것은 기독교 신학과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이교도들의 가르침을 화해시켰으며, 설상가상으로, 이교도들에 의해 전해졌다. 이러한 사실은 기의와 기표의 견고하고 닫힌 통합이, 회복될 수 없는, 견고한 의미의 손실을 암시하며 분열되는(entame'라는 것이 데리다의 단어일 것이다) 위기로 이끌었다. 표의는 열린다. 한편, 복사와 인용은 auctoritas-하나의, 권위 있는 출처-에 의지하며, 논쟁적인 대화에서는 인용들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비록 유일하지는 않다 해도, 무기였다. 그러므로 중세는 상호텍스트성의 시대였다.

   더욱이 중세는, 오늘날 우리들의 시대가 speculum fractum(조각난 거울)의 시대라고 불리울 수 있는 것에 반해, 보르헤스와 에코 양쪽에게 매혹적인 summae(완전한 목록, 포괄적인 세계관)의 시대였다. 이것이 내가 이 에세이를 뱅상 드 부베의 Speculum quadruplex 혹은 speculum maius (4중적 혹은 보다 큰 거울)를 모범 삼아 막연하게 구성한 이유이다. 그것의 타이틀 페이지로부터 판단하건대, 완전함을 향한 중세의 갈망에 대한 더 이상의 중요한 해설은 없는 듯하다:


   Speculum quadruplex: naturale, doctrinale, morale, historiale.


In quo totius naturae Historia, omnium scientiarum Encyclopaedia, moralis philoso- phiae thesaurus et actionum humanarum Theatrum amplissimum exhibetur; ita ex optimorum auctorum elegantissimis sententiis inter se concatenatis contextum opus [나의 강조].


   4중적인 거울: 자연적, 교리적, 윤리적, 역사적.


모든 자연의 역사, 모든 과학의 백과사전, 윤리철학의 보물, 그리고 인간 행동들의 무한히 광대한 극장이 보여지는 곳; 그러므로 그 작품은 최고의 저자들의 가장 우아한 문장들로 함께 짜여지고(함께 텍스트화 되고), 그들 사이는 사슬모양으로 엮어진다.8)


상호텍스트성의 현대적 정의 또한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이번에는 문맥적인 틀의 배경 이미지를 위한 가장 전형적인 권위인 드 부베가 나의 auctoritas이다. 사실 그는, 다른 auctoritates의 주최자처럼, 보르헤스와 에코의 작품들의 코드이다. 범죄 등과 같은 인간의 행위들과 사건들은, 이 저자들이 대표하는 것에서 나온 추론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럼으로써, 저자들이라는 교리적 권위라는 것으로부터, 이 저자들은 허구 속에서 준()-인물들이 된다: actor (auctor-actor). 보르헤스와 에코 양측의 수학적 경도라는 가정 아래, 알라누스 아브 인술리스는 그의 수학적 공리적 방법으로 인해 가장 선호되는 스콜라적 백과사전주의자로서 보다 잘 해당한다. 두 사람의 작품들에는 명백하고 감추어진 그에 대한 참고들과 그로부터의 인용들이 풍부하다. 보르헤스가 aleph(알렙)이라는, 한 작가를 위한 세상에서 가장 소망되는 것에 연결시키는 알라누스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알라누스는, deus est sphaera intelligibilis cuius centrum ubique, circum- ferentia nusquam"(신은 그 중심이 어느 곳에나 있고, 그 원둘레는 어느 곳에도 없는 이해 가능한 구이다)라는, 보르헤스와 에코가 기호학에 연결시켜 아마도 가장 자주 인용하고 언급하였던 문장인 그 신학적인 규칙을 받아들였던 의사()연금술적 Book of the Seven Wise Masters일곱 명의 현명한 스승들의 책(성스러운 auctoritas가 되기는 힘든)을 연구하였다.9) 더욱이, 알라누스는 상호연관적 코드 속의 다른 기표 시스템에서 취해진 한 요소로써 단순 텍스트의 한 요소를 대치하며 우리들의 언어에 cipher라는 단어로 들어온, 하나의 아라비아 단어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chifre()10) 알라누스는 그러므로 누군가가 보르헤스의 부정적인 기호학이라 부를 만한 것에 직접 이끈다.

   마지막으로 에코가 universalia(유명론)에 관한 논쟁이 극점에 달했던 바로 그 중세 후기를 재구성하기로 하였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며, 존경받을 만한 박사 로져 베이컨의 사도, 윌리엄 오브 바스커빌이 유명론의 주요 대표자인 무적의 박사 윌리엄 오브 옥캄과 동시대인이었다는 것 또한 우연이 아니다. universalia에 관한 논쟁에 대한 옥캄의 답은, 일반적 개념들은 단지 유사한 것들이 한데 합쳐진 데에서 비롯된 말들이거나 이름들(nomina)일 뿐이라는 것이다-초기호학적. 장미의 이름은 의미심장하게도 Stat rosa pristina nomine, nomina nuda tenemus"(장미는 이름 속에서 신선하게 남겨진다. 우리가 가진 것은 오직 이름뿐이다)라는 말로 끝난다. Baskerville이라는 이름에 관하자면, 그것은 기호를 대표하는 기호, 14세기 영국의 식자공 John Baskerville의 이름을 글자대로 따라 지어진 이름이다. 그러나 모범적인 독자는 아마 보다 최근의 유명한 상호텍스트성을 선호할 것이다: 형사(혹은 기호 해석자) 셜록 홈즈가 그의 믿음직한 동료, 와트슨(아드소)의 도움으로 The Hound of the Baskervilles 바스크빌의 사냥개"의 수수께끼를 푸는 것.

   움베르토 에코는 보르헤스에 매혹되었다는 사실을 숨긴 적이 없었다. 두 저자들의 사고 방식의 평행들 목록은 끝이 없다. 나는 평행들과 유사점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영향에 대해 말하는 것과, 더 늙은 저자를 아버지와 같은 인물로 나타내는 것은 보르헤스적이지도 않고 에코식도 아니기 때문이다(의미심장하게도, 에코는 형용사화 하는 의미론적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전/후라는 시간과 그에 상응하는 인과관계라는 관례적 개념을 미리 가정한다-특히 post hoc, ergo propter hoc (이것 다음에, 그럼으로 이것 때문에)이라는 스콜라적 우주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할 때. 영향에 관한 염려는 없지만, 그 모든 내포들를 고려할 때 하나의-성스럽지 않은-이름: 바빌론에 포함될 수 있는, 유사점들과 공통적인 강박관념들은 있다.

   바빌로니아: 그것은 기원전 5천년 전 우르의 그림문자 점토판인, 씌어진 기호의 탄생이다. 그것은 숫자들의 신비스러운 상응이며, aleph(알렙)이 연금술사들의 소우주, 축소화된 다양성, multum in parvo(작은 다수)가 되는 곳인 카발라의 기원이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 mulier amicta(창녀), 그에 대한 남자의 환상,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성 요한의 묵시록과 동의어적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마치 백과사전에서 그러하듯, 하나의 코드 혹은 가정된 참고가 또 다른 ad infinitum(무한)으로 이끄는, 불가사의한 미로이다: 범죄가 잃어날 수 있고 그 흔적이 사라지는 곳인 믿을 수 없는 실마리들로 가득한 코드들, 암호들, 가면들을 통해 오직 비밀의 복도들로만 관통된 우주의 거울인 도서관.11) 의미심작하게도, 상상의 대륙 우크바르는, 이전에는 바빌로니아 혹은 앗시리아가 있었던 이라크 혹은 소아시아 지역 (F.S 14)으로 추론된다. 무엇보다도 우선, 바빌론은 일반적인 언어, 그 의미의 배반, 그 혼돈, 폭발, 그리고 마지막 dis-semination(-, 기호)이다. 악마적으로 전도된 Savior(구세주)의 이미지이자, 이교도적인 fraticelli(형제단, dolce와는 거리가 먼[달콤함과는 거리가 먼] 수도승 dolcino의 사도들)의 무리에서 도망쳐 나왔으며, 그 최후의 심판이 다른 사람들을 교화시키기 위한 속죄의 거울이 될 운명이었던, 반항적인 가짜 수도승 SalvatorePenitenziagite!(회개하라!)라고 강박적으로 중얼거린다(135). Penitenziagite"는 라틴어도 아니며 프로방스어도 아니고 신의 징벌 이후 첫날의 바벨의 언어, 태고의 혼돈의 언어이다(48).

   speculum maius 혹은 우주의 거울인, 도서관 입구 위에는, 불길한 기호들이 새겨져 있다: MENE, MENE, TEKEL-말하자면, 단칭적 의미의 규칙인, 신께서는 너의 왕국의 날들을 셈하셨다(188). 너는 시험 결과 모자라다는 것으로 밝혀졌다: 항상 의미의 결핍이 있다; 의미는 결코 가득 찬 적도 닫힌 적도 없다. 사전은 언제나 끝없고 주기적인 동어반복 속에서 그 자신의 항에 대한 다른 항을 언급한다.

   MENE, MENE: 훗날 다니엘, 보르헤스 그리고 에코는 기호의 해석자들이거나, 혹은 헤겔이 Encyclopedia of sciences 자연의 백과사전에서 Mittelpunkt(중심)라 불렀던, 기호를 만들어내는 환상에 대한 해석자들이다. 그들은 살인본능에 가까운 종교적인, 때로는 전도적으로 종교적인(신성모독적인), 열망을 가지고 해석을 하였다. 이것이 내가 에코를 부친살해로 비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보르헤스를 에코의 아버지와 같은 인물로서 얘기하는 것을 망설이는 두 번째 이유이다: 장미의 이름에서 살인자 수도승은 호르헤 데 부르고스이다.


   b. 경구적 거울

   살인적으로 매혹적인 주제를 조작 가능한 크기로 만들기 위해, 나는 대여섯의 가능한 질서들을 고려하였다-오히려 수도승적인 것들-그러나 각각은 불가능한 세계로 퇴보하였다. 이상적으로, 이 에세이는 장미의 이름이 볼 수 있는이라는 이유(마치 볼 수 있는이었기 때문에 자연적인 삐에르 메나르의 작품의 그 부분처럼)로 첫 번째 기둥이 되는, 텍스트의 네 개의 평행한 기둥들을 병렬함으로써-데리다의 Glas같이- speculum quadruplex의 형태를 취해야 한다. "El jardi'n de senderos que bifurcan"(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Artificios"(기교들)이라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 보르헤스의 Ficciones El Aleph 함께 speculum mentis 될 것이다: 두 번째 기둥. 미의 이름의 자연적인에서 반영된 교부적이고 스콜라적인 글쓰기는 speculum doctrinale(교리적 거울)이 될 것이다: 세 번째 기둥. 네 번째 기둥은 에코의 이론적인 글쓰기를 구성할 것이며, 기호학적 동물로서의 사람에 관한 speculum meditationis(명상적인 거울)이 될 것이다.

   텍스트들의 이러한 네 개의 기둥들은 선회축 위의 빳빳한 포스터들처럼 장착되어야 하며, 영구운동으로서, 네 개의 원통 모빌처럼, 가변적인 속도로 끊임없이 돌아야 하고, 그럼으로써 가능성의 법칙과의 일치를 통해, 그것들의 모든 측면들은 어느 시점에서 나머지 것들의 모든 측면과 직면하여야 한다. 혹은 집중적이고, 불동등하고, 회전하는 디스크로 이루어진 기계를 통해 세상의 모든 비밀들을 풀 준비가 되어 있는(BAR 65) 레이먼드 룰의 정신 속에서 무엇인가가 될 수 있다. 그것은 결정적으로 하나의 프린터에게는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나는 이미 나 자신을 삼차원적인 우주에서 찾은 이후, 내 질서의 원리는 그 중심이 어느 곳에나 있고, 그 둘레는 어느 곳에도 없는 하나의 구가 될 것이다. 나는 그 아이디어를 보르헤스의 Aleph에서 하나의 가정으로서 얻었다-내가 처음으로 그것을 인식하였던 것, 그것은 나에게 관례적인 연대기학을 타락하게 하고, 원인과 결과의 논리를 해체하게 하는 독자나 탐정으로서였다. 그것이 후에(나의 독서 과정에서) 알라누스 아브 인술리스의 작품(내가 그것을 다시 만난, 장미의 이름에서의 auctor-actor)과 그 제목이 장미의 이름의 철자바꿔쓰기인 Le Roman de la rose 장미의 이야기: 쟝 드 뫼는 알라누스의 신학적 규칙(우리가 보았듯이, 그 출처가 의심스러운): 신은 그 중심이... 구이다12)에서 나타난다. 그것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다.


   c. 보잘것없는 거울

   그러한 일을 조망함으로 인해 형이상학적인 현기증에 사로잡혀, 나는 구형적인 것에서 선적인 것을 선택하였다-씌어진 텍스트는 자연히-naturaliter-선적인 것이라는 의미에서 주께서는 찬양받을지어다. 나는 독자에게 단지 장미의 이름의 수도원적인 질서를 따를 것과, 그곳에서, 어떤 코드에 의해 다른 방향의 포기 위에 하나의 방향이 선택될 때 미로의 모든 코너에서 희생될, 그 결과는 복권-이를테면 바빌론의 복권처럼 도박적인 것인,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모든 가능성들이나 가능한 전개, 갈라지는 길들을 찾으라고 권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독자는 (아직) 씌어지지 않은 소설의 모든 가능성들을 추론해야 한다.


   d. 축복받은 야곱의 거울

   미국의 페이퍼백판의 화려한 표지에 관해 보자면, 장미의 이름은 이제까지의 것들 중 가장 훌륭한 미스터리 소설로 환영받았다.13) 저작권 페이지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바에 의하면, 그 일러스트레이션은 스페인 묵시록의 채색사본에서 취해졌으며, 베네딕트파 수도원의 뜰에서, 악사들과 무희들의 우아한 장면에서 천사가 환영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엔터테인먼트식 묵시록은, 손에 값비싼 바카라 장미를 들고 있는 미국식으로 남자다운 수도승의 초상을 위한 배경을 형성한다. 그것이 미스터리한 소설이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mystery라는 단어는 결정 불가능한이다. Corpus Christi()credendi necessitatis(연적 믿음의) 대상이며; 그 유일한 증거는 성서이다. 범죄의 미스터리는 탐정/암호해독가가 기호들을 색인, corpora delicti(리적 신체)로 해석하는 것에 의해 풀린다. 그의 행동 방식은 가능한 세상에 관한 유추와 추론 iudicandi libertate(유로운 판단) 제안적인 자세들에 의지하는 사건들 혹은 사건들의 가능한 과정의 가정된 상태들일 것이다.14) 하지만, 만약 범죄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여졌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렇다면 거기에는 훌륭한, 복잡한 매듭이 있게 되고, 그것을 풀기(476) 위해서는 먼저 성서, 성스러운 것뿐만 아니라, 그것이 이교도적인 것을 포함한, 그 어떤 auctoritas라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성서를 해석할 때의 탐정과 성직자의 차이는 일반적으로 기호들의 auctoritas에 대한 존경의 정도에 있다. 전자가 색인이 될 수 있는 어떤 재료라도 고려하는 반면, 후자는 (그가 호르헤 데 부르고와 같이 traditio(성전)에 배제적으로 헌신하고 있지 않은 이상) 의미하는 의도(훗설의 의미에서는 Bedeutungsintention)를 살필 것이다-씌어진 표식에서 더욱 명백히 함축되어 있지만, 재료의 흔적에 함축되어 있다 해도. 윌리엄 오브 바스커빌이 말하듯: 책들은 믿겨지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물음에 종사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가 책에 대해 고려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 묻지 말아야 하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물어야 한다(380).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vouloir-dire(말하고자 하는 의도)이다.15)

   윌리엄 오브 바스커빌은, 그와 상동한 인물인 보르헤스의 La muerte y la bru~jula"(죽음과 나침반)의 뢴로트처럼, 너무나 많은 의미하고자 하는 의도(혹은 숨기고자 하는 의도, 결국은 같은 것인)를 미리 가정하는 경향으로 인해 처음에는 잘못 인도된다. 그들은 이러한 미리 가정된 의도들의 가능한 추적에 관한 추론에서 너무 생각이 좁았다. 의미에 의해, 책들로부터 취해진 코드들로 인식한 것에 의해 요점이 가려지면서, 바스커빌과 뢴로트는 하나의 가능한 세계: 하나의 단순한 우연성을 버리는 경향이 있다.

   기호들을 향한 가능한 자세들은 모든 거울을 포괄한다: 보잘 것 없는 것을 비롯하여, 밝혀진 진실의 기호들에 대한 자기-망각적인 복제, 복제하는 듯한 수도승의 자세(오직 반복뿐, 어떠한 코드에 의한 전환도 아니며, 하물며 해석은 더욱 더 아닌), 해석학(고도로 코드화된, 그러므로 제한된 해석) 그리고 발견적 교육법(계통적인 가설들에 의해 새로운 요소들을 찾는 기술, 가능한 세계들과 상응하는 코드들을 구체화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자유)까지. 발견적 교육법은, 허구, 특히 상상적인 플롯 혹은 수수께끼를 얼버무려 넘기는 보르헤스식 허구에 가까운, als ob(as if) 철학16)의 합법성을 의미한다. 이 기술을 사용하여, 이를테면 누군가는 알려지지 않은 말()을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며, 읽혀지지 않은, 그리고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 책을 다시 쓸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발견적 교육법은 아마, 그리고 대개는, 경험적인 추론들과 결합된다.

   그러므로, 장미의 이름 중 페이퍼백 커버에서 유혹적인 것, , 이제까지의 것들 중 가장 환상적인 미스터리 이야기를 찾는 사람들은, 옳다. 그리고 가장 환상적인 신학적이고 존재론적인 변증법 혹은 The Battle of Books(책들의 전투)를 찾는 사람들도 옳다. 이 연결은 기호학이다; 아드소의 애매한 약속 나중에 오는 이들을 위해 남겨둔다... 기호들의 기호들, 암호해독의 기도가 그것들 위에 행해지게끔을 보라(4, 나의 강조).

   자네는 참으로 훌륭한 사서였네, 윌리엄이라고 호르헤 데 부르고스는, 발견적 교육자, 앵글로 색슨, 경험주의적인 조사관, 바스커빌-스크린에 반영된 소설의 상호미디어텍스트성(만약 inter-media-textuality라는 신조어 사용이 허락된다면) 속에서 윌리엄 오브 바스커빌, 제임스 본드, 일명 숀 코너리에게 한탄하며 인정한다. 그 어느 것도, 부조리한 인물설정의 요약된 편집, 돈키호테: 키가 크고, 마르고, 아마도 50번의 봄을 보았을(9), 그리고 물론 영리한,을 강하게 암시하는 바스커빌의 첫 번째 신체적 이미지를 에코로 하여금 희생시키게 한 충분한 이유보다도 더 에코적인 것은 없다. 결국, 바스커빌은 현실의 이상향을 찾아 Knight of the Mirrors(거울의 기사들)와 무자비하게 싸우는 Knight of Woeful Countenan-

ce(비통한 표정의 기사)가 아닌가?

   나는 범죄수사와 신학이 기능적으로 상동한 것이라는 나의 가설이 부적당한 적용들인지 어떤지 의문스럽다. 나는 그것들의 역전가능성-제임스 본드가 훌륭한 신학자가 될 수 있었을지에 관해 모른다. 하지만 단순한 방법의 유사함보다는 더 복잡한 것이 있다. 그것은 공통된 하나의 결과: 진실의 추구, 혹은 진실에 의해 결정되는 특정한 방법이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반영된 바울의 nunc(지금)tunc(그때)에서의 소문자 n에서 소문자 t로의 변화와 같은, 해결할 수 없는 차이의 세상이 도출되어 나올, 알파벳의 한 글자를 대문자화 하느냐 (혹은 마느냐) 하는 것이다.


II. 수수께끼 속에서


   a. 자연적 거울

   우리는 자연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마음에서 만들어진 것들에 대비되어 경험적 관찰에 제공된 materia prima(첫 번째 재료) 혹은 hyle(물질). 후자는 그들 자신을 그 물질적 토대 위에 각인시킨다. 보르헤스식-혹은 베네딕트식-우주에서, hlye은 책들로 이루어져 있다. Histroria universal de la infamia(불한당들의 세계사)에서, 보르헤스는깡패들, 노예 상인들, 그리고 살인자들에게 일대기를 준다. 각각의 이야기들은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책들에 토대를 둔 것으로 나타난다. 그것이 내가, 자연의 불평(알라누스에 의한... Planctus Naturae)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speculum naturale이해하는 방식이다.

   speculum은 겉보기에, 개와 소, 양과 새끼 양 그리고 스라소니에 의해 노래 불러진 창조자에 대한 찬양(339)인 아드소의 그것과 달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같은 것이다: 아드소는 세상을, 장미의 이름에서 소와 연계되어 단 한번 언급되었지만 나의 추론적 질서의 권위, 뱅상 드 부베에 의한 자연적 거울인, 책을 통해 보고 있다. 그와 같은 것이 아드소 자신의 사랑적 거울을 파악한다: 자연이란 무엇인가? 비참한 소녀의 머리카락은 쥘레드 산 주변을 따라 누워 있는 염소 떼이다(291). 그녀의 목은 다비드의 탑이고, 더 많은 그런 서책적인 기쁨은 아드소를 자극한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소녀는 아드소가 솔로몬의 세계를 내면화시킨 것 보다 더 이국적인 세계이다-그 자신의 고백 오직 텔레비젼을 매개로해 현시대를 아는 것에 비해 중세라는 실제 세계에 편안함을 느낀다는에 의하면, 마치 에코의 경우처럼. 수도승들은 그들이 매일 보는 수도원장의 구체적이고, 살아 있는 말을, 말의 관념적, 문학적 이미지가 불러일으켜졌을 때, 윌리엄 오브 바스커빌이 그것에 대한 존재하지 않는 기억을 책들의 토대 위에 재구성하였을 때, 인식한다. 커다란 눈, 너울거리는 콧구멍-그것은, 카르투파의 이시도어 오브 세빌에 의해 성립된, 최고급 아라비아산 말의 코드이다(19). 그 말이 Nigellus WirekerSpeculum stultorum(바보의 거울)에서 취해진 당나귀의 이름을 갖는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자연스러운 것이며, 그것은 로져 베이컨과 옥스퍼드의 be^tes noires(혐오스러운 무리들)인 파리의 신학자들을 이기는 것을 의미했다.

   에코는 평범한 거울이 기호들을 만들어 내는 능력을 부정하는데, 그것은 선행이 결과를 지시할 때 그 사이에 기호학적으로 필요한 관계가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며, 거울 이미지가 부재할 수 없는 대상의 출현 위에 출현하기 때문이다.17) 거울이란 단지 어두첨가이다-아드소가 자기 스승의 안경을 인식한 것인, 윌리엄의 두 개의 유리 아몬드를 잡고 있는 갈라진 핀(82)처럼. 그러므로 그것은, 기호가 거짓말을 하기 위해 사용되어질 수 있는 반면, 거짓말을 하기 위해 사용되어질 수 없다. 그것은, 그 모든 거울들이 우리의 교화와 윤리적 발전을 위해 우리에게 제공된, 플라톤으로부터 놋커 발불루스까지의 위대한 사상가들의 거울에 대한 매혹을 설명하는 퇴화의 불가능성이다.

   그러한 성직자다운 열망은,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거울에 더 관심이 있는 보르헤스나 에코의 탓으로 돌려질 수 없다. 죽음과 나침반에서, 범죄자의 계획을 해석하기 위해 탈무드적인 텍스트를 취한, 탐정 뢴롯트의 추론은 그를, 마치 우리의 베네딕트파 수도원처럼, 쓸데없는 대칭들과 편집적인 반복으로 가득 찬(F.S 157-158) 범죄자의 집으로 정확하고도 운명적으로 인도한다. 거짓말을 하기 위해 사용되어지는 거울들이 있다. 진리로의 근접한 관찰을 이끄는 대신, 계몽을 사랑하는 윌리엄 오브 바스커빌를 격분시킨 사실, 즉 수도원의 도서관이 지식을 널리 퍼뜨리는 대신 숨기기 위해 사용되어졌던 것과 마찬가지 방법으로, 혼란을 창조해 낸다. 이제 호르헤 데 부르고스의 악마적인 마음은, finis Africae라고 코드화된 도서관의 금지된 부분을 보호하기 위해 왜곡된 거울들과 환각을 일으키는 약들의 조합을 사용한다. 그 코드는, nullius animi curiositate violata(그 어떤 호기심도 침입하지 못)18)하게 하기 위해 마련된, 가장 위험한 이교도와 무신론자 저자들이 숨겨진 곳을 지시한다. 평범한 선원에 대한 전설적인 위협으로서 충분히 해독될 수 있는-다시 말해, 지브랄타, finis Africae가 스페인에서 유럽과 만나는 곳, 이교도들이 수학, 광학, 암호학, 그리고 확언, 아베로스, 아비세나, 그리고 그들을 통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들로 기독교성을 썩게 하며 그 기독교성을 지배하였던 곳, 그 누구도 그러한 헤라클레스의 기둥들에 다가가서는 안 되었다. 호르헤의 카톨릭적인 도시 부르고스는 재정복, 이단심문, 그리고 그러한 결과로 인한 자유롭고 인간적인 사고의 지연의 수단이 될 것이었다. 그러한 금지된 finis Africae를 지키기 위해, 호르헤 데 부르고스는, 에코의 기호학으로 훈련된 자신의 적에 맞서, Semiotics and the Philosophy of Language(기호학과 언어철학)에서 직접 비법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변덕들, 왜곡된 거울들.

거울 이미지들은 기호들이 아니며, 기호들은 거울 이미지들이 아니다. 그리고 여전히 거울들이 기호적으로 정의될 수 있는 프로세스를 만들어 내는 데에 사용되는 경우들이 있다.

첫 번째 특이한 경우는 Le Roman de la rose(장미의 이야기)에서 그 놀라운 효과가 이미 아랍의 [!] 물리학자들에게 관찰되었던 왜곡된 거울의 경우이다. [!]19)


   특정한 허브와 같이, 환각을 일으키는 물질들은, 치료와 중독이라는, 그리이스어로 Phar-

makon이라 명명된, 단정할 수 없는 특질을 갖는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들은 책들과 유사하고, 나중에 장미의 이름에 접목된 데리다식/플라톤식 상호텍스트적 유희 플라톤의 약국에서 우리가 발견했던, 일반적인 글쓰기와도 유사하다.20) 배반적인 유리들과 finis Afiricae의 배반적인 풀들이 조합된 효과들은, 기술의 거울, mulier amicta(타락한 여자, 창녀)-아드소를 녹아웃시킬 만한- Speculum amoris(사랑적 거울)을 묘사한 갖가지 무어적/기독교적 묵시록들의 난외주석에 의해 더욱 더 발전된다.

   마침내 우리의 수사팀은, 우크바르의 상상적인 대륙이 아니라 finis Africae와 항상-달아나는 금지된 책, 그 도둑맞은 편지, 잃었다가, 찾았다가, 다시 잃어버린 그것들을 거울과 백과사전의 결합에 의해 발견하게 된다(F.S 13). Supra idolum viginti quatuor"(거울 위에서 넷이 보고 있다)라는 코드의 모든 가능한 해석들 중에서, idolum"eidolon(환영, 유령)으로 본 해석은 옳은 것이었다. 그것은 베난티우스가 그리이스어로 생각했다는 사실에 대한 추론으로부터 나온 결과였다. 이것은 overcoding()코드화의 실행이었다(베난티우스의 심리학적 특수성과 코드화할 당시의 그의 마음 상태를 고려하였을 때). 사실, eidolon이란 이미지와 거울일 뿐만 아니라 ghost유령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finis Africae, 허브들의 부가적인 조건 부여에 의해, 바스커빌과 아드소가 자기 자신들을 유령이라고 인식하였던 곳인, 왜곡된 거울 뒤에 있었다. 그러한 경험으로 인해 그 거울 앞에서 무서워 도망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그들은 장미의 이름의 온 종말론적 구조가 지향하는, finis()를 찾았다: 범죄 플롯의 현시(enigma수수께끼), 우주의 거울의 묵시, 도서관의 불에 의한 파괴(ekpyrosis).

   그것이 틀을 갖는다는 것은, 백과사전이 무제한적이 된다는 사실과; 거울이 제한된다는 사실과 비슷한 것이다. 장미의 이름의 틀(하나의 백과사전이 바로 영원의 역사, 그들의 영혼 속에서 일어났던 것에 대한 섬세하고 비밀스러운 거울[He 35]로서의), 성 요한에 의한 창세기의 첫 번째 말들인 절대적인 시작(the absolute Beginning)의 시작과, , 추론된, 절대적인, 극단적인 끝, 성 요한의 묵시록이다. Multum in parvo, 혹은 오히려 infinitum in parvo반영하기 위해, 에코는, 소위 사실주의 소설의 시간 사용을 패러디함으로써, 보다 인간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가능한 세계를 선택하였다. 우주적 틀 안의 인간적 틀은 첫 챕터의 상투적 시작 문구이다: 11월 마지막 날의 아름다운 아침이었다. 그러나 그 적절한 modus ponens(진술을 배치하는 방법)는 창세의 시간인 7일간으로의 분할로 인해 즉각 부풀어오른다. 첫날, 세 째 날과 같이 종교적으로 하위 분할된 그 7일은 가능한 speculum naturale이며, 그것은, 그 날들이 주님의 해(anno Domini) 1327년에 상상 가능한 개인들에 의해 살아졌다는, 사실을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천지창조적 틀은 그 대칭을, 두 위대한 적대자들인 윌리엄 오브 바스커빌과 호르헤 데 부르고스 사이의 첫 번째와 마지막 직면의 speculum doctrinale(교리적 거울)에서 찾는다. 첫 번째 대화는 교리적 문제론을 마련한다; 마지막 대화는 Revelation계시(Apocalypsis)에서 그것을 해결한다. 체스 게임에서 거울 사용 호르헤 데 부르고스가 결정적인 강점을 가지고 있는 움직임을 결정한다: 그는 게임의 규칙과 상대의 신분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윌리엄 오브 바스커빌은 둘 중 어느 것도 알지 못한다 - 그는 오직 단편적이고 신뢰할 수 없는 증거로부터 추론을 만들 수 있다; 그는 여러 가지 가능한 코드들을 시도하고 제외하고, 다양한 암호들을 해독함으로써, 추론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만들어 낼 수 있다:


우리는 그것들 전부와 그밖에 다른 것들도 시험해 봐야 할거다. 하지만 메시지를 해독하는 데에 있어서 첫 번째 규칙은 그게 뭘 의미하는지를 생각하는 거다... 상응하는 규칙이 찾아져야 돼.

   찾아지다니 어디서요?

   우리 머리 속에서. 만들어 내 봐.(191-92)


만들어 낸다는 것은 허구적인 세계(사건들의 상태, 사건들의 과정)를 현실의 세계로 가정하는 것이다.... 두 세계들은, 비록 형태상 차이가 있지만, 추론적인 행동들에 의존한다.21)

   하지만 그러한 픽션에는 부속적인 의미의 과도함, 우연적인 자료의 과도한 해석의 위험이 있다. 특히, 백과사전적인 마음은 유추라는 악마, 인과관계, 아무도 없는 곳에 있는 보는 연결들의 희생에 민감하다. 뢴로트와 바스커빌의 유일한 결점은 코드에 대한 일관성을 상황에 투영하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게임의 규칙들을 악마적으로 자기만족적인 상대방들이 원하는 대로 만든다. 이런 틀 안에서, 저 계몽된 과학자는, 시각적인 보철술(도움)을 받았을 때 조차도, 수수께끼에서 수수께끼로 길을 더듬어 가는 반면, 광적인, 장님 호르헤 데 부르고스는-마치 얼굴을 마주보는 것처럼-명확히 본다. 사실, 아드소는 그의 스승이 정확히 무엇을 찾는지를 잘 모르고, 특히 바스커빌이 자기 자신에게 답에는 가깝지만, 어느 것인지는 모른다(367)고 말했을 때처럼, 때로는 그가 그 자신을 잘 모를지도 모른다고 의심한다.

   미로로서의 도서관이라는 보르헤스식/바빌로니아식 개념은 미로로서의 백과사전이라는 에코의 청사진에 따라, 베네딕트파의 도서관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된다. 그것은 제3의 미로에 해당한다(테세우스의 선적인 그리이스의 미로와 독일의 Irrgarten미로정원 혹은 미로에 상대하여). 그것은 주요 생김새가 모든 점들이 다른 점들과 연결되어 있고, 그 연결들이 설계되어 있지 않아도, 인식은 가능한(가능한 세계들)... 그물... 혹은 꾸불꾸불한 길이다. 그물이란 제한이 없는 영역이다... 그것은 중심도 외곽도 갖지 않는다.22) 이것은 이상하게도 그 중심이 ...한 구를 생각나게 한다.

   맹목이라는 것은 보는(지역적으로) 유일한 길이고 사고는 길을 더듬어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이러한 종류의 미로에 의해 대표된 근시적인 연산법으로 복제하는 유일한 방법에 대한 에코의 묘사이다. 이 기술을 체현하는 것은 명백히 장님 호르헤 데 부르고스이다. 그러므로 그는, 사실상 무한한 해석들의 그물조직에 의해 미로처럼 구조화되는 것으로 인식되어져야 하는 문화의 세계인 이 기호술의 세계의 마스터이다.23)

   그렇다면, 이 기호술의 세계는 해석자가 마디마다 다음 방향을 선택해야 하는 갈라지는 길들의 끝없는 그물조직이다. 이것이, 관념적으로 열린 책이 발전의 모든 가능성들을 갖는 소설이어야 하는 이유이다. 그러한 소설을 쓰는 것은 -바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F.S 106)에서 운남성의 성주 취팽의 노력인- 미로를 만드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b. 교리적 거울

   쟝 리카르두24)에 의하면, 보르헤스는 미로의 신이기 때문에, 미로들에 관한 구절들은 에코 자신의 소설에 관한 기호학적 이론들과 연결된 키 포인트들이다. 그 소설은 우연한 사건이었고, 한 번 자신을 순전히 이야기하는 즐거움(xviii)-코드들의 엄격함으로부터의 도피로 보이는 gou^t fabulateur(이야기하는 취미) 혹은 베르그송의 fonction fabulatrice(허구-만들기 기능)에 버려 둠으로 해서 생긴 열매였다. Hier bin ich Mensch, hier darf ich's sein"(여기에 나는 사람이므로, 여기에 나는 있을 수 있다)라고 괴테의 파우스트는 부활절 일요일 중세 도시 성벽 밖에서의 즐거운 산책을 위해 자신의 공부를 떠난 뒤 안도하며 외친다. 그러나 주의하라: fabula아리스토텔레스의 enigma해석들 중 하나이다. 바스커빌은 반복적으로, 바로 픽션의 als ob(as if) 기능은 기호들을 해석하는 수사관에게 필요하고; 회의적으로 모험적인 가설들에 접목된 상상은, 그를 관념론적 편중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한다고 주장한다. 바스커빌은 그물의 한 마디에서나 가능한 local지역적" 관점을 절대적인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한다. Local지역적"(훗설은 regional지역적"이라 했을) 진리들은 언제나 편협하고, 편파적이고, 억압적이고, 배타적이다: 진정한 cat'holicism카톨릭성(모든 세계를 향해 기원한, orbis et urbis지방과 도) 그리고 보편적인 aggiornamento무지역성(마음의 열림과 역사에의 적응)에 반대. 바스커빌은 기호들과 그 배합들을 opera aperta(열린 노)로 간주하여 읽는다. 그는 -닫히고, 제한되어 있고, 지성적이고, 혹은 우주적이고 절대적인 족쇄로서의 auctoritate권위가 세워진 종교적인 지역; 위대한 심문관 혹은 호르헤 데 부르고스의 전체주의-인 교리를 거부한다.

   바스커빌의 회의적인 마음에게는, Liber Mundi(세상의 책)에 의해 가정된 직접적인 등가성은, 환유적인 접근에 의해 합쳐진 은유의 은유의 은유로서, 최대한 상당히 간접적인 은유적 레벨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진리는 기호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관계 속에도 있다(599). 그가 마침내 베난티우스의 암호(금지된 책에 관한 기록)의 코드를 발견했을 때, 그는 여전히 기호들의 기호들만을 갖는다. 다음에 나오는 그리이스어 텍스트는 신비스러운 언급들로 구성된다. 그러나 이 페이지는 신비스러운 책의 특징을 재-창조하는 데 있어서 하나밖에 없는 가능한 시작점이고, 그리고 그것은 오직 우리가 살인자의 특징을 추론할 수 있게 하는 그 책의 특징으로부터 나온다(341). 읽히지 않은 책에 대한 언급의 단편들은, 미지의 그리고 아마 존재하지 않는 대륙 우크바르에 대한 언급의 단편들처럼, 바스커빌의 마음에 희미하게나마 de'ja` lu(이미-읽은)를 불러일으킨다. 책들은 책들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마치 그들이 그들끼리 말하는 것 같다(342)라는 말은 그의 상호텍스트성에 관한 정의이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기억한다 해도, 문맥적 틀에 관한 아이디어 없이는, 그가 읽은 다른 것들만을 사용해서 미지의 책을 재-창조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문맥이란 바로 그 책을 숨긴 이유이기 때문에, 문맥적 선택이 가장 중요하다. 그것은, 수도원 생활(특징)에서라는 것과 책들에 관한 가르침들이 동시적이기 때문에, 교리적 특징에 관한 것인 듯하다. 다른 여러 방법으로 논쟁을 시작할 때, 이 가정은 대신 책의 특징에 대한 직관을 허용할 것이다. 추측-책들이 범죄의 기원이라는-은 경험적 사실의 기초를 둔 평범한 설명보다는, 바스커빌의 취향에 맞는 것이다. 이것은, 보르헤스의 뢴로트가 세상의 모든 지식인들의 고집스러운 키호티즘을 표현하며 형사에게 말하는 것처럼, 다음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가능하지만, 흥미롭지는 않습니다. 당신은 현실이라는 게 조금도 흥미로워야 할 의무는 없다고 반박하실 테지요. 나는 현실이란 게 흥미로워야 할 의무는 없지만, 가설들은 그래야 한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신이 제안한 것에는, 단순한 우연이 거의 모든 것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죽은 랍비와 마주하고 있습니다: 나는 평범한 상상적 범죄자의 상상적 재난보다는 순전히 랍비적인 설명을 선호할 것입니다.(F.S 149)


   새로이 해독된 12궁도적인 암호와 그리이스어의 단편들이 아직 흥미로운 가설을 포기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리고 그가 시험적으로 취한 (흥미로운) 코드(묵시록)에 관해 여전히 이종()적인 상태에서, 바스커빌은, 마치 뢴로트가 Tetragrammaton(의 이름의 첫 글자가 발음되었다[F.S. 150)에 대한 언급들을 따라가는 것처럼, 무엇인가가 성 요한의 책의 과정(첫 번째 천사가 첫 번째 트럼펫을 불었다)에 따라 일어나기를 기다린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불행하게도, 그들에게 씌워진 계획, 상상의 코드를 이미 알고 있는 그들 각각의 상대방들도 그렇게 한다. 그들은 순전히 현실의 우연들에서 비롯된 post factum나중에 일어난 사실들을 해석자들에 의해 ante factum먼저 일어난 사실로서 상상된 서책적인 논리로 그들의 행동을 가장한다. 플롯이 없었다(수수께끼)라고, 바스커빌은 마침내 깨닫는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실수에 의해 발견하였다(599). 이것은 엄격히 말해 비문법적 진술이고, 기호학적인 패러독스이지만, 그것은 진실이다. 이것이 보르헤스와 에코의 존재론에 관한 빈틈없는 요술의 특징이다. 나는 이해했다라고 뢴로트의 범죄자인 샤를라흐는 말한다, 당신은 하시딤 교도들이 그 랍비를 희생시켰다고 추측하리라는 것을. 나는 당신의 추측을 정당화하는 것에 전념했다(F.S. 161).

   사실상, 샤를라흐와 호르헤 데 부르고스는, 에코가 그 예견된 해석이 그 생성적인 과정의 일부인 통사적-의미적-실용주의적 장치25)라고 정의했던 opera aperta의 특히-모범적인 독자들이다. 그러나 죽음과 나침반과 장미의 이름 양쪽에는 보르헤스적인 작가정신의 전도(Aufhebung중지, 폐기)가 있다. 누군가는 뢴로트와 바스커빌 또한 모범적인 독자들-그러나 씌어지지 않은 텍스트의-로 고려할 것이다. 보다 정확히 하자면, 그들은 상상적인 텍스트에 행간주석을 쓰고 있다. 그들의 적들은 그 다음 단계로서 그러한 단편들을 가지고 텍스트를 재-창조한다. 그러므로 뢴로느와 바스커빌은, 자신들이 텍스트를 해석적으로 취급하고 있다고 믿으면서, 사실은 생성적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단지 영적인 설명이 우연적인 사건들보다는 보다 흥미로운 가능한 세계를 반영한다는 이유로, 신참자의 열망을 가지고 탈무드의 글자에 집착함으로써, 그 자신의 신학적-발견교육법적 편중의 운명적 희생자가 되는 것은 바로 프로 범죄 조사관인 뢴로트이다. 바스커빌은 그 반대로, 코드를 전환시켜야 한다는 최종적인 발견에 의해 구원받는다. 이제부터 그는 텍스트를 초()코드화함으로써; 호르헤 데 부르고스의 심리학적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리적 자세들을 그의 철학에 대한 증오와 웃음에 대한 두려움과 아울러 고려함으로써, 그것을 재-창조해야 한다. 이것들은 해석의 코드화되지 않은 결정요인들이다.26)

   보르헤스와 에코의 형사 소설을 다른 평범한 미스테리 소설들과 구분시켜 주는 것은, 에코에 의해 설명된 세 종류의-고문서학적, 상호연관적, 그리고 제도적27)- 코드들을 뒤얽히게 하는 것이다. 상호연관적인 코드(모르스 부호 혹은 암호와 같은), 그 가장 단순한 형태에 있어서, 등가()들의 시스템이다. 거기에는 코드화된 메시지가 있고, 코드 해독자의 능력이 옮겨쓰기 규칙의 지식을 구성한다. 옮겨쓰기는 전위()와 대체()로 실현될 수 있다.28) 전위의 한 가지 예는 철자바꿔쓰기이다. 이를테면, 장미의 이름은 정수()와 같은 프랑스 소설 장미의 이야기의 부분적인 철자바꿔쓰기이다. 그러므로 상호연관적인 코드는 모든 상호텍스트적 메카니즘들, 모든 함축들, 해석적인 가능성들, 그리고 배합에 의해 해방된 심리학적 효과들을 고려하였을 때, 단순한 등가성의 가능성들을 초월한다 - 코드화하는 쪽(그의 Bedeotungsintention의미화 의도)에 있어서나 독자(그의 수용) 쪽에 있어서나. 왜냐하면 양쪽 모두 모든 가능한 조건화와 문맥에 의해 결정되므로. 이제, 우리는 이미 초코드의 영역에 들어와 있다. 해석의 심리학적이고 관념론적인 결정요소들(바로 그 특성이 코드화되지 않음으로써) 초코드화를 필요로 하며, 그것은 마치 undercoding(불완전한 코드화)이 불충분하게 이해된 코드의 거친 적용인 것처럼29), 일반적으로 세 개의 기본적인 코드들로의 보충적 실행이다. 평범한 미스터리물에서 상호연관적인 코드들은 기호들과 지표들의 해석을 지배한다. 그러나, 보르헤스적인 방식으로 조금 나타난, 가장 단순한 미스터리는 코드들의 현기증과 악마적인 전도로 이끌 수 있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명백히 삐에르 메나르의 돈키호테의 귀결이다.

   범죄 소설을 예비-텍스트의 단계에 종속시킴으로써(연대기적 수용과 mauvaise foi(나쁜 믿음)의 도덕적 수용에서), 보르헤스와 에코의 소설들을 존재론적이고 의사-형이상학적인 손재주로 구분시켜 주는 것은, 세 종류의 코드들과, 그것들의 하위 코드들과 그것들의 만화경적인 배합의 복잡한 정도이다. 미스터리 소설은, 마치 중세가 그럴 수 있는 것처럼, 하나의 예비 텍스트이다. 에코에 의해 인식된 열 개의 중세들이 있으며, 그들 중 하나는 예비 텍스트로서의 중세이다. 이러한 열 개의 작은 중세들 각각은, 오직 그 특유의 천년의 예기를 언급하기 위해, 장미의 이름에서 발굴될 수 있다.30)

   그러한 모든 기호학적 고려들은 바스커빌을 책들에 관한 책에 관련된 충돌하는 교리들 속에서 마침내 범죄들의 가능한 동기들을 찾도록 이끈다. 바스커빌과 아드소를 처음으로 대면하였을 때 호르헤 데 부르고스가 한 첫 말들은 교리적인 키 센텐스를 형성한다, Verba vana aut risui apta non loqui"(공허한 말이나 웃음을 자아내는 말을 하지 말지어다)(87). 이것은, 베네딕트회의 설립자인, 엄격한 누르시아 사람 성 베네딕트의 말이다.31) 그의 규칙(제도적인 코드)은 수도승에게 있어 공허한 말이나 웃음을 자아내는 말을 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바스커빌에 대항한 체스 게임에서, 호르헤 데 부르고스가 베네딕트의 규칙을 인용한 것은 첫 움직임이다. 그는, 순수하게 교리적인, 흰색을 둔다. 바스커빌의 보편주의는 대조적으로, 흑마술에 의하지 않다 해도, 최소한 무어족의 과학과 유머를 향한 부패적인 경향에 의해, 오염되었다. 사실, 바스커빌이 다른 질서에서 왔으며, 그가 다양한 공식적인 기독교 질서들의 분류 이상의 것을 언급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은 장님이면서도 보는 자를 모면하지 못한다. 호르헤 데 부르고스에게 있어서는, 세계는 단 하나의 질서를 갖으며, 그러므로 다른 질서에서 온다는 것은 적그리스도에게 속한다는 것이다.

   대체로, 전체주의적 광신자들은 누군가가 필연적인 공갈 사용에 의해 그들의 성스러운 불이라고 느낄 법한 희미한 동정이나 감탄조차도 파괴한다. 호르헤 데 부르고스는 아드소에게 이름이 같은 사람, 아드소 오브 몬티에--, Libellus de Antichristo(적그리스도에 관한 소책자)의 저자, 호르헤에 의하면 아무리 주의해도 지나치지 않는 경고를 떠올리게 하고, 또 그는 위협한다: [적그리스도]가 온다! 너의 마지막 날들을 웃음으로써 낭비하지 말거라(93).

   윌리엄과 아드소는 이 예언을 악마적으로 전도된 장님이면서도 보는 자에게서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들었다. 그들 중 하나가 Savior(구세주)의 전도된 이미지이자, 회개하라라는 바벨적인 말과, 미래에 올 draco()을 조심하라(47), 그리고 동시에 예수님은 올 것이고 모든 사람들은 회개를 해야 한다(49)고 말한, Salvatore였다. 그들은 후에 노쇠한 알리나르도의 중얼거림의 왜곡된 거울에서 같은 예언을 인지한다. 호르헤 데 부르고스의 예언을 지지하는 이 모든 단편들로써, 심리학적 분위기-구조화되지 않은 코드-는 강제적이 된다.

   베네딕트파 수도승들과 그들의 프란시스코파와 도미니크파 방문자들 사이에서 주로 예수가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을까(사도들에 의해 보고된 주님의 재산은 수도원에 있는 그의 종들의 부와 두드러진 대조를 이룬다)에 대한 교리적인 분규가 일어나는 반면, 호르헤 데 부르고스의 폭력적인 관심은 적그리스도의 징후로서의 웃음에 관한 것이다. 바스커빌은, 모든 가능한 세계들을 고려에 넣는 그의 포용력은, 사람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를 지적하고 웃음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고유한 것(108)이기 때문에, 그의 웃음의 가능성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추론을 끌어낸다. 그러나 장님 호르헤 데 부르고스의 극도의 명석함은 언제나 그로 하여금 그의 적을 발견하게 한다; 그는 그가 바스커빌보다 무한히 더 위험한 것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다른 모든 훌륭한 경기자들처럼, 그는 다른 경기자들의 기술을 연구하였고 자신의 움직임의 역사를 외우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타격을 피할 준비가 되어 있다: Quomodo ergo eo uti non potuit? Forte potuit, sed non legitur eo usus fuisse"(그가 웃을 수 있었다는 것이 어째서 불가능한 것인가? 그는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한 번이라도 그 가능성을 사용하였다는 사실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32) 해석의 가능성에 있어서 글자를 개성적으로 평가함으로써, 그는 대답한다 사람의 아들은 웃을 수 있었고, 충분히 그럴 수 있었을 것이지만, 그가 그랬다는 것은 기록되어 있지 않네(108). 그가 인용하는 12세기의 편찬자(compilator) 페트루스 칸토르는, 그의 Verbum abbreviatum(약된 말)에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 번이라도 그 가능성을 사용하였다는 사실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라는 바로 그 문장보다, 가능한 세계들의 기호학자들에 의해 더 관념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문장을 올리지 못하였다.

   호르헤 데 부르고스가 웃음을 묵시록과 공동체 안에서 이미-느낀 적그리스도의 출현에 대한 절박함과 연결한 것은 speculum doctrinale의 한 면을 구성한다. 다른 한 면은, 배타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 히에로니무스,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사람들에 의해 요구된 신학에의 종사로서가 아니라, animi curiositate(호기심) 자체를 위한 지식 습득을 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와 책임감에 대한 바스커빌의 선()인문적인 믿음이다.33)

   호르헤 데 부르고스의 세계에서는, 대조적으로, 의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각각 모인 주최자측과 방문객측, 교황의 사절에게 한 그의 열변은 교리의 신성화이다:


이 공동체 안에서 교만의 뱀이 또아리를 틀었다.... 우리의 일은 지식의 보존이다. 보존. 내가 탐구라고 말하지 않는 것은, 신성한 것으로서의 지적 재산은 완전한 것이고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발전이란 없고... 가장 지속적이고 숭고한 요약만이 있다.... 오직 주석하는 것, 보존하는 것만이 있다.(482)


그렇다면 웃음이 있을 수 있는 자리는 어디인가? 세상의 순환이 막바지에 이르려 할(485) 때 누가 웃고 싶어할 것인가? 그런데 괴물 호르헤 데 부르고스가 쫓는 것은 무엇인가? 지적인 교만인가, 단순한 요약으로부터의 해방인가, 독자적인 사고인가, animi curiositas호기심인가? 혹시 그것은 웃음인가? 사실, 그것은 같은 것이다. 그것은, 그 웃음이 가득 찬 배와 많은 포도주의 결과인, 단순한 것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지적인 교만과 웃음은 연결되어 있고, 그 배합은 오직 호르헤 데 부르고스의 시체 위에서만 허용될 것이다-말 그대로. 웃음이란 속된 것 혹은 타락한 것, 횡격막의 신경적인 경련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신에 대한 종사에, 좋을 수가 없다. 그리고 만약 어떤 auctoritas웃음을 긍정적인 것, 우리의 진리에 대한 이해를 돕는 것으로 제시한다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어떤 진정한 auctoritas그렇게 했다고 씌어 있지는 않는다. 바보들 혹은 이교도들이나 그렇게 했을 것이다. 만약 심각한 auctoritas의해 이루어진 웃음에 대한 연구의 기록된 증거가 있었다면, 그것은 그것에 이끄는 모든 실마리들과 함께 숨겨져야 되었을 것이고, 만약 필요하다면 파괴되어야 했을 것이다. 호르헤 데 부르고스와 같은 사람은 웃음을 적그리스도의 징후로서 인식하는 것에 속박되어 있다: 그것이 다른 어떤 동등한 것으로도 코드화되지 못한다는 이유뿐만 아니라 그것이 모든 코드들, 사본들, 법들을 분해한다는 이유 때문에도 이상한 것이다.

   여기에는 웃음과 지적 교만의 연결 고리가 있다: 탐구자의 자긍심. 그는 아마 갑자기 어떤 조화되지 않은 것-같은 기준으로는 잴 수 없으나 겹쳐 있고(쥴리아 크리스테바가 position en catastrophe라고 부른), 겹쳐진 부분은 그 어느 쪽 시스템으로도 설명되어지지 않는- 두 개의 기호 시스템에 직면한 자기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이것은 희극을 생산해 내는데, 그 희극이란 보르헤스와 에코에 의해 맛보아진 조화되어지지 않은 특정한 징후들의 희극, 혹은 동물의 머리를 가진 사람과 그 반대의 경우(부분적으로 두 개의 시스템을 두 개의 격자와 같이 가정한)를 나타낸 아델모의 채색 장식의 효과와 같은 것이다. 비록 그것들이 신성한 페이지들에 주석을 달고는 있지만, 아드소는 그러한 채색 장식이 자연히 재미를 불러일으킨다(86, 나의 강조)고 느끼지 않았던가? 그러나 오직 하나의 시스템만이 있을 수 있으므로-예언자들에 의해 주어지고 교부들에 의해 해설된 것 하나-, position en catastro-

phe는 있을 수가 없다. Verbum unum et santum(하나의 성스러운 말).

   그러나 바스커빌은 그것은 지옥의 힘이 지배하기 때문에 미덕 그 자체의 과도함에 의해 나온 것이라고 인식한다(584):


나는 오늘 밤 [적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았다: 호르헤의 얼굴. 철학에 대한 증오로 일그러진 그 얼굴에서 나는 처음으로 적그리스도의 초상을 보았다... 그는 유다의 종족이나 먼 나라에서 온 것이 아니다. 마치 성자에게서 이단자가 나오는 것처럼, 적그리스도는 경건 그 자체, 신이나 진리에의 과도한 사랑에서 태어날 수 있다.... 예언자들을 두려워해라, 아드소, 그리고 진리를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도, 왜냐하면 대게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자신들과 함께, 자신들보다 먼저, 때로는 자신들 대신, 죽게 만들기 때문이다(598).


어떤 사람은, 오래된 혹은 새로운 중세에 그들 자신은 대게 성전에서 살아남아 호메이니만큼 늙을 수 있는 성전의 전쟁신들에 의해 세계로 내보내진 자살 테러 부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답은 무제한적인 기호술 고유의 시스템적인 의문인가? 이것은 아마 잔혹한 신성()에서 무혈(), 무척추의 속된 상대주의로 이끌 것이다-가능하지만, 흥미롭지는 않은. 그러나 그것은 도덕의 문제이고, 작가들과 철학자들은 많은 시대를 통틀어 자신들을 오히려 도덕의 결여에 안주시켜왔다. 그들이 견딜 수 없는 것은 형태의 결여이다-통각()될 수 있는, 도식으로 축소할 수 있는, speculum에 의해 반영될 수 있는, 기호들로 번역될 수 있는 형태; 기호학적인 동물의 본능을 충족시키기 위해 보상될 수 있는 형태. 만약 이 수도원이 하나의 speculum mundi세상의 거울이라면, 너는 이미 답을 갖고 있을 수도 있다고 바스커빌은 말한다. 하지만 그런가요?라고 아드소는 묻는다. 세상의 거울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 세상이 형태를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다라는 말로 윌리엄은 결론짓는다(136). 그것은 어쨌든 진리의 기호들에 대한 키호테적인 추적을 계속해 가는 사람, 그 누구보다도 더 사람들을 웃김으로써 그 누구보다도 더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인물인 비통한 표정의 기사의 우울한 체념이다. 아마도 인류를 사랑하는 자들의 임무는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것일 것이다... 진리를 웃게 만드는 것, 냐하면 유일한 진리는 진리에 대한 광적인 믿음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자유롭게 만드는 법을 배우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598, 나의 강조).34)

   앞서 나는 탐정과 기호학적 실행 사이의 기능적인 상동관계를 보였고, 그들의 공통적 특징들과 신학 사이의 연결을 제안하였다. 그 연결 고리는 질서, 즉 기표들을 유도해 내고, 그들 사이의 관계를 위한 코드들을 고안해 내기 위한 하나의 절대적 기의(훗설의 용어)의 전제이다.35) 기호학자들과 탐정들은, 만약 무제한적인 기호술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들의 추적에 방침을 주고 가장 기본적인 발걸음을 결정하기 위해 처음에는 그러한 질서가 존재하는 것처럼(as if) 행동해야 한다. 그러나, 허구의 요소인, 것처럼(as if)이라는 요소에 더하여, 기호학적인 본능이 인도하는 곳은 믿음의 영원하고 기초적인 딜레마이다: 우주에 질서가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은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의 자유로운 의지와 전능성을 손상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의 자유는 우리의 유죄선고이고, 혹은 잘 보아도, 우리의 교만에 대한 유죄선고이다. 하지만 어떻게라고 아드소는 묻는다, 전적으로 가능한 것들의 조직물인 필연적 존재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신의 절대적인 전능함과 태초의 혼돈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 겁니까?36) ...그것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아닙니까?(600). 바스커빌은 이것에 무표정한 모습으로 반응하고 경구로서 대답한다. 그는 오직 그 정도만 알고 있다: 우리는 수수께끼 속에서(in aenigmate) 끊임없이 가정적(as if)으로 움직여가야 한다.


III. 얼굴을 맞대고

   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의 두 번째 권을 보고 싶소(567). 마지막 단계에서 두 중요한 적대자들 사이에서 숨겨진 이름이 마침내 발음되었다. 마치 범죄자 샤를라흐가 대칭적인 반영을 하는 집의 미로에서 뢴로트와의 직대면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호르헤 데 부르고스는 미로의 가장 은밀한 곳, 거울 너머의 finis Afiricae에서 윌리엄 오브 바스커빌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 두 범죄자들은 그들의 상대방들에 의해 구상된 계획을 따르고 있는 것처럼 행동함으로써 그렇게 하였다.

   호르헤 데 부르고스는 자신의 비밀을 그렇게 기꺼이 밝힌 적이 없었다: 그가 체스판 위의 졸들처럼 경멸을 갖고 조종하였던 그런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마침내 바스커빌에게서 자신에게 어울리는 적을 발견함으로써-윌리엄은 예전에 알려지지 않은 말을 재-창조했을 때 썼던 것과 같은 테크닉으로써 희극에 관한 알려지지 않은 책을 재-창조하였다-, 호르헤데 부르고스는 고백을 한다: 겸손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교만에 의한 것. 그러한 것은 사실상, 인간의 허영이 그 두 사람으로 하여금 비극적인 연쇄 사망과 신성한 말 그 자체, 그들의 거대한 싸움의 목적을, 그들의 전술들에 대한 그들 서로의 탄복의 추구, 그들의 기호학적 능력 때문에 잊게 만드는, 적그리스도의 힘이다. 이 원수들 사이의 죽음의 직대면에서 가장 놀랄만한 악마적 전도는, 거기에서 애정과 같은 것, 즉 그들의 최종적으로 진실된 고백-거의 사랑을 암시하는 것- 중 서로의 존재를 해석하는 데에서 비롯된 서로의 동일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해자에 대한 희생자의 평범한 사랑이 아닌데, 그 이유는 그 게임에서의 위치적인 가치가 정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석자와 피분석물의 동일시가 아닌데, 그것은 이 텍스트의 주체와 객체가 서로 뒤엉켰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마, 샤를라흐와 뢴로트 간의 대면에서는 분명히 그렇듯이, 공모 혹은 텍스트를 실제화하는 데 있어서 독자에 의해 행하여진 상호 협조적인 활동이다.37) 이것은 반사적인(거울) 현상이며 그것은 auctor(저자), actor(배우), 그리고 lector(독자)가 마치 우아한 미뉴엣에서처럼 규칙적으로 위치를 바꾸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명히, 그리고 양측에 있어서, 교만이다. 교만은 우리가 동등한 수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가까이로 우리를 데려간다.

   그것, 기호학에 기초한 상호 텍스트적인 능력과 기호의 해석은, 소설의 마지막에서 그들 자신을 자신들의 자기-평가와 자신들의 교만의 징표로서 드러낸다. 그 이름(onoma이름, word, sign)이 지시하는 것처럼, 장미의 이름은 기호학(기호의 과학)에 관한 책이다. 기호는, 진리와의 연관과 갖가지 미래들의 색인으로서, 보르헤스와 그의 모든 ficciones픽션들의 주제이다. 그렇다면, 기호학이라는 말은 어째서 단 한 번도 발음되거나 씌어지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그 주제가 체스인 수수께끼에서, 유일하게 숨겨진 말은 무엇인가?

체스라는 말이다.(F.S 114)


   어째서 호르헤 데 부르고스는, 대량 살인이라는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바로 그 책, 웃음을 다루고 있는 대여섯의 책들 중 하나, 웃음의 영혼을 정화, 치료하는 특질을 다루고 있는 그 책을 숨겼을까? 왜냐하면 그것이 철학자, 교부들에 의해 전해진 참된 세상의 이미지를 악마적으로 전도시켰던 사람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576). 아리스토렐레스의 시학(계에서 유일한 사본이 그 수도원의 도서관에 있는)의 두 번째 권의 원고는 스페인에서 오래 전에 발견되었고 호르헤 데 부르고스에 의해 finis Africae숨겨졌다. 삐에르 메나르의 테크닉과 비교될만한 방법으로 그 두 번째 권을 쓴, 윌리엄 오브 바스커빌로부터 우리는 그것이 비극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알려진 책에 대한 보완, 말하자면 희극과 풍자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을 배운다. 비극이 우리의 감정들을 공포와 연민에 의해 생산된 카타르시스 속에서 정화시킨다고 말해지듯, 희극은 상관적인 효과를 갖아야 하는데, 그 이유는 우스꽝스러운 것의 기쁨을 우러나게 함으로써, 그것이 그 감정의 정화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웃음은 가장 경건한 기독교도들에게까지도 유익한 교화적 기능을 갖는 것이고, 그것은 불과 칼에 의해 타도되어야 할 이단인 것이다.

   이교도들의 중개를 통해 기독교 세계에 다다른 그 원고는, 의미심장하게도, 아라비아어와 시리아어 텍스트와 함께 묶였고, 그것들 밑에 숨겨졌다. 철학자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만약 접근할 수 있다 하면, 그것은 가공할 만한 힘을 갖게 될 것이었다: 도대체 뇌의 작용에 전이되는 배의 작용이라니(577). 그 어떤 반동자들과 마찬가지로, 호르헤 데 부르고스는 엘리트주의자이다: 단순한 자들은 말을 하면 안 된다. 이 책은 단순한 자들의 혀가 지혜를 나르는 매개물이라고 정당화했을 것이다. 이것은 방지되어야 했다. 그것이 바로 내가 했던 것이다(582). 호르헤 데 부르고스에게 있어서, 이 책은 영적인 천 마리 전갈들의 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본초학자의 독물(pharmaka) 수장품에서 훔쳤고, 이교도들로부터 왔으며, 천 마리 전갈들의 독처럼 물리적으로 치명적인 독으로 그 책의 페이지들을 물들였다.

   당신이 바로 악마요라고 윌리엄 오브 바스커빌은 마지막 전도에서 교만에 대한 그 자신의 고발을 함으로써 말한다. 악마란 영혼의 오만이고, 웃음 없는 믿음이고, 결코 의심에 사로잡히지 않은 진리요(581).

   사냥꾼과 희생물, 저자와 독자의 정체성을 결정할 수 없는 곳, 혹은 공저자로서 그들이 서로의 계획에 따랐던 곳인, 그 악마적으로 곡해된 협력의 마지막 대면에서, 샤를라흐는 호르헤 데 부르고스보다 친절하다. 그는, 뢴로트에 의해 상상된 또 다른 미로를 포함하는 또 다른 가능한 세계를 위한 계획을 엄격히 수행하는 방법으로, 뢴로트를 즉시 처리한다. 샤를라흐로 하여금, 그가 다음 번에 뢴로트를 죽일 때는, 그 도식으로서 사각형의 마름모를 쓰지 말고 선()적인 그리이스의 미로(에코가 묘사한 바에 의하면 테세우스의 미로)38)를 쓰게 했던 뢴로트의 협조적인 제안은, 최선의 선적인 가능성을 적용함으로써 충실하게 실행되었다: 발포.

   호르헤 데 부르고스 또한 그 자신의 계획과 윌리엄 오브 바스커빌에 의해 전가된 계획의 충실한 수행을 완벽하게 하였다. 천 마리 전갈들의 독으로 물든 페이지들을 삼킴으로써, 그는 금지된 책을 영원히 숨긴다. 무질서한 책 더미에 아드소의 기름 램프를 던짐으로써, 그는 묵시록의 매듭을 짓는다.


IV. 비장(), 유칼리나무

   Eu-kalyptos(비장), 계시(apokalypsis)animi curiositatis(호기심)으로부터 보호되어, 잘 숨겨진 것을 의미한다. 아픈 목에 대한 가장 순수한 pharmakon(해독제)인 그 식물에 대한 보르헤스의 집착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어떤 코드를 적용해야 할까? 감정적인 혹은 미학적인 초코드화를 시험함으로써 시작해야 할까-유칼립투스 나무가 가장 진정한 아르헨티나의 식물이고, 그 우아하게 움직이는 실루엣은 아열대 풍경의 차별적인 특징이고, 특히 남부는 장밋빛의 커다란 집 주위의 향기로운 유칼립투스라는 보르헤스의 추억의 버릇 중 하나인 어린 시절의 애착이기 때문에? (F.S 196). 혹은 이 나뭇잎들은, 일단 나무에서 떨어지면 가죽처럼 변하므로(codex사본은 원래 줄기를 의미한다), 당신이 그것들 사이를 걸으면 살랑거리는 원고 조각들을 암시하며, 양피지를 연상케 하는가? 운명적인 대면을 향해 가는 도중, 뢴로트는 여러 해에 걸쳐 혼란스럽게 쌓여 있는 부서지고 딱딱한 나뭇잎들을 밟으며, 유칼리나무들 사이를 걸어나갔다(F.S 157). 러 해에 걸쳐 혼란스럽게 쌓인 나뭇잎들(페이지들), 말하자면, 상호텍스트성이다.

   장미(의 이름)의 마지막 잎에서, 우리는 이제 어른이 된 아드소가 한 때 수도원의 도서관이 있었던 원형의 폐허, 지혜의 요새, 기독교의 긍지 속에서 바싹 마른 양피지들 사이를 잰걸음으로 걷는 것을 본다. 그는 기호들의 기호들을 찾고 있다: 나의 끈기 있는 재구성의 끝에서 나는 내 앞에 단편들, 인용들, 미완성의 문장들, 책들의 절단된 그루터기들로 이루어진 보잘것없는 종류의 도서관을 갖고 있었다(609).

   기호들의 기호들은 마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에 의한 것처럼, 그것들이 해석, 반영, 허구에 열려 있게끔 잘 숨겨져(eu-kalyptos) 있다. 우리는 반드시, 유칼립투스나 그 밖의 어떤 재료라도 사용하는 보르헤스의 결합을 위한 가능성으로서의 단 하나의 진리로 이끄는 제도적인 코드를 제거해야 한다. 호르헤 데 부르고스의 발전은 없고... 오직 보존만이 있는 신성한 것(제도, 전통, 권위)에 대한 금기의 광적인 방어에, 윌리엄 오브 바스커빌은 보르헤스의 말로 대답했을 것이다: 신학자들은 이 세상을 보존하는 것이 영구적인 창조라고 주장하고, 여기서는 그렇게도 대립적인, 보존한다와 창조한다라는 동사가 천국에서는 같은 말이라고 주장한다(He 35). 두 동사들을 실제로 결합할 수 있는 사람은 태어나지 않았고, 알라누스 아브 인술리스의 놀랄 만큼 비문법적인 형용사를 마지막으로 한 번 사용해 말한다면, 아마 innascibilis(태어나지 못할)일 것이다. 태어나지 못할 인물을 만들어 내었던 것은 보르헤스였을 수도 있다. 그러한 인물이 아마도 그 안에서 살 수 있는 세계는, 우리의 참고의 세계관, 우리의 백과사전으로서는 접근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지만 innascibilis는 신의 속성이다.

   그러나 보르헤스로써, 사람들은 오직 한 권의 책을 만들어 내기 위해 창조된 가능한 세계의 nascibility(태어날 가능성)"를 믿게끔 이끌린다.



1) Umberto Eco, Postscript to The Name of the Rose (New York: Harcourt, 1984); Umberto Eco, The Name of the Rose(1980; New York: Warner, 1984). 장미의 이름의 다른 모든 인용들도 이 판본에 의하며, 텍스트에서는 삽입구로서 제공될 것이다.



2) 다음의 작품들 또한 이 에세이를 작성하는 데에 참고가 되었다: Jacques Derrida, L'Ecriture et la diffe'rence(Paris: Seuil, 1967): Jacques Derrida, Marges de la philosophie(Paris: Minuit, 1972); Emir Rodri'guez Monegal, Borges: Hacia una interpretacio'n(Madrid: Guadarrama, 1976); V.-L. Saulnier, La Litte'rature du Moyan Age(Paris:PUE. 1948).



3) Ge'rard Genette, Palimpsestes: La Litte'rature au second degre' (Paris: Seuil, 1982).



4) 모든 라틴어와 스페인어 번역은 나의 것이다.



5) enigma에 관해서는, riddle"이라는 미국판의 번역은, 미의 이름의 문맥에 있어서 중요한, 그리이스어의 어의(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를 표현하지 못한다.



6) 다음과 같은 작품들: Umberto Eco, A Theory of Semiotics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79): The Role of the Reader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84); 그리고 Semiotics and Philosophy of Language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84).



7) Vincent de Beauvais, De eruditione filiorum nobilium, ed. Arpad Steiner (Cambridge, Mass: The Medieval Academy of America, 1938). xv.



8) Vincent de Beauvai, Speculum quadruplex sive speculum maius. Opera Theologorum Benedictorum. Bibliotheca Mundi, 1624년 원본에 대한 완전한 사본(Graz: Akademische Verlagsanstalt,1964/1965), 타이틀 페이지.



9) Ernst Robert Curtius, Europa~ische Literatur und lateinisches Mittelalter (Berlin: Franke, 1948). 125.



10) Eco, Semiotics and Philosophy, 165.



11) Ibid., 172.



12) 그 규칙은 다음에서 찾을 수 있다. Abbe' Jacques Paul Migne, Patrologie cursus completus, serie latina, 221 vols. (Paris, 1844-1855), PL CCX 627 A, Curtius에서 인용, Europa~ische Literatur, 357.



13) 어떤 사람들은 에코가 탐정-기호학자의 입장에서, 보다 적절하고 보다 세련된 탐정소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하며, 유명한 등장인물인 제임스 본드에 매혹되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현한다. 실제로 에코는 플레밍과 같은 서술 구조와, 기호학적으로 조사되어야 할 사회-심리학적 현상으로서의 제임스 본드나 슈퍼맨과 같은 인물들에 흥미를 갖고 있다(Umberto Eco, Travels in Hyperreality [New York: Harcourt, 1986, 144-72).



14) Eco, The Role of the Reader, 219. 장미의 이름의 미국판 번역은 가능한 세계들에 관한 기호학적으로 결정적인 구절을 생략한다. p. 110. 원고의 다른 중요한 탈문이 일어나는 곳은, pp. 120279.



15) Jacques Derrida, Positions (Paris: Minuit, 1972). 23.



16) Hans Vaininger, Die Philosophie des Als Ob (Berlin: Reuther and Reichard, 1911).



17) Eco, Semiotics and Philosophy, 214. 216.



18) Beauvai, De eruditione, 55.



19) Eco, Semiotics and Philosophy, 217.



20) Jacques Derrida, La Disse'mination (Paris: Seuil, 1972), 70-197(78-79).



21) Eco, The Role of the Reader, 217-19.



22) Eco, Semiotics and Philosophy, 81(나의 강조).



23) Ibid., 82, 82, 83(나의 강조).



24) L'Herne: Jorge Luis Borges(Paris, 1964): 25-26.



25) Eco, The Role of the Reader, 3.



26) Ibid., 22; Eco, A Theory of Semiotics, 129.



27) Eco, Semiotics and Philosophy, 165.



28) Ibid., 172.



29) Eco, A Theory of Semiotics, 129.



30) Eco, Travels in Hyperreality, 68, 72.



31) Curtius, Europische Literatur, 385.



32) Ibid., 424.



33) Beauvais, De eruditione, xv.



34) 미셸 푸코는 자신의 씨앗 같은 책 Les Mots et les choses의 발생지로서 보르헤스의 텍스트를 지적한다. dans le rire qui secoue a` sa lecture toutes les familiarite's de la pense'e" (그것을 읽고 있는 동안, 모든 생각의 버릇들을 산산이 부숴 버리는 웃음 속에서). Michel Foucault, Les Mots et les choses (Paris: Gallimard. 1966), 서문.



35) Edmund Husserl, Husserliana, Gesammelte Werke (The Hague: Martinus Nijhoff, 1350-).



36) 여기에서 나는 불어 번역 tissu de possibles," 가능한 것들의 조직물, 부베의 contextum, concatenatum 같은, 함께 짜여진 것을 선호함으로써 영어 번역 polluted with posible."에서 벗어나 있다.



37) Eco, The Role of the Reader, 39.



38) Eco, Semiotics and Philosophy, 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