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 그리고...나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역자해설(김선형)

알포 2009. 5. 9. 14:56

 

역자해설: 신화의 베일에 갇힌 그녀를 향하여(1)

실비아 플라스만큼 “신화”라는 말이 어울리는 존재가 또 있을까. 충격적인 죽음 이후 그 이름은 수많은 맥락을 타고 중층의 신화로 재창조되었다. 여신처럼 아름답던 금발의 유망한 미국 여류 시인이 핸섬한 당대 최고의 천재 영국 시인과 결혼하며 시작된 현대 영미문학계 최고의 황금빛 로맨스는, 플라스가 남편의 외도와 잇따른 별거 이후 백 오십 년 만에 찾아온 런던의 혹한 속에서 홀로 우울증과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옆방에서 노는 두 아이가 배고프지 않도록 우유와 빵을 놓아두고 가스가 아이 방으로 못 새어 들어가게 꼼꼼하게 문틀에 테이프를 바른 후, 가스 오븐에 서른 살의 젊디젊은 머리를 처박고 자살을 한 바로 그 순간 완벽한 악몽이 되어 참혹한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이 순간은, 끝이 아니라 거대한 시작이었다. 있는 그대로, 아무런 의미도 투사하지 않고, 그냥 평범한 개인적 비극으로 내버려 두기에는 너무나도 상징적이었기에, 이 사건은 일약 전설의 반열에 올라 한없이 재생산되고 소비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다른 이유들로 실비아 플라스의 시에, 삶에, 죽음에 강박적으로 매혹되었고, 그녀의 신화는 이러한 평단과 대중들의 매혹에 반사되고 증폭되어, 자연인 실비아 플라스의 진실과는 무관하게, 추상적이고 원형적인 거대한 상징적 존재로서 계속 부풀고 또 부풀어만 갔다.

실비아 플라스의 신화화를 그 무엇보다 열렬하게 부추긴 것은, 당시, 즉 1960년대 초반 꿈틀거리며 태동하던 본격 페미니즘의 시류였다. 이 강력한 시대적 조류를 타고 실비아 플라스의 삶과 작품은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베티 프리단의 <여성성의 신화The Feminine Mystique>가 실비아 플라스가 사망한 1963년 출간되었다), 크게 주목받지 못하던 시인 실비아 플라스는 당장 남성의 세계에 희생된 여성적 시인의 전형, 페미니즘의 기치를 든 피 흘리는 여신으로 등극했다. 여성의 야망과 성적인 생명력을 용서하지 않은 남성의 세계, 여성적 감성을 난도질한 남성적 이성, 나아가 남편 테드 휴즈의 외도로 상징되는 폭압적 남성성 그 자체에 희생된 신화적인 순교자로 추앙된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은 활활 끓어오르는 분노로 반응했다. 엘리자베스 2세의 계관시인까지 지냈던 20세기의 대문호 테드 휴즈였지만, 추상적이고 원형적 ‘여성’ 그 자체를 대변하게 된 “실비아 플라스”의 살인자라는 오명만큼은 평생 낙인처럼 달고 다녀야 했고, 강연이나 시낭독회마다 시위대를 무슨 팬클럽처럼 몰고 다녀야 했다. 실비아 플라스의 무덤 묘비명에 새겨진 남편의 성 휴즈Hughes라는 글자들은 새로 새기고 또 새겨도 분노한 실비아의 추종자들에 의해 지워지고 또 지워졌다. 실비아 플라스는 60년대와 70년대에 폭풍처럼 흥성한 페미니즘의 조류를 예고하고 체현하며, 자기도 모르게 여성 해방 운동의 신화적 순교자라는 아이콘이 되고 말았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 편으로 실비아 플라스와 테드 휴즈의 폭풍 같은 러브 스토리와 비극적인 파국은 또한 대중들에게 끊임없는 매혹을 제공하는 궁극의 대중적 연애 신화로 소비된다. <가디언>지의 주말판 편집자인 캐서린 바이너의 적나라한 표현을 빌자면 두 사람의 이야기에는 진정 “고급 연속극 같은 매혹”이 있다. 그리고 그 대중적 매혹의 일부는 “테드 휴즈가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워 떠난 직후, 플라스가 자살을 했다”는 극적인 사실에 기인한다. 이 대중적 드라마 속에서 실비아 플라스는 배신당한 희생자라는 역할에 갇혔고, 그 역할은 엄청난 연민을 자아내는 극적 매혹이 있었다. 혹자는 플라스의 이야기는 “해피엔딩만 빼고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는 동화(童話)”라고 말했다. 사실 실비아 플라스 자신이 의도적으로 드라마틱한 멜로드라마로 자기 삶을 디자인한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녀의 삶을 규정하는 몇 가지 유명한 일화들은 극적이다 못해 작위적인 느낌이 들 정도다. 세계적인 땅벌 권위자이자 보스턴 대학 생물학 교수였던 아버지 오토 플라스의 때 이른 죽음이 남긴, 평생 동안 지워지지 않는 심리적 트로마는, 실비아 플라스를 동화 속의 원형적인 ‘고아’로, 찬탈당한 공주로 자리 매겼다. 그런가 하면 ‘쿵’ 하고 무섭게 부딪는 맹렬한 키스 끝에 실비아 플라스가 테드 휴즈의 뺨을 피가 철철 나도록 물어뜯어 평생 사라지지 않는 흉터를 만들어 놓았다는, 그 유명한 첫 만남의 일화는 또 어떤가. 게다가 이 잔혹하고 흥미진진한 연속극의 드라마는 실비아 플라스의 죽음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살아남은 캐릭터들은 관객을 실망시키지 않고 이 극을 끝까지 센세이셔널하게 끌어나가기로 작정한 사람들처럼 보인다. 놀랍게도, 휴즈와 플라스 부부의 결별 원인이었던 휴즈의 두 번째 아내 아씨아 웨빌Assia Weville마저 딸 슐라를 데리고 동반자살을 선택했던 것이다. 이로서, 테드 휴즈를 바라보는 외부의 시각은 더더욱 복잡해졌고, 그는 불행한 운명의 희생자로부터 냉혈의 살인마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충족하는 완벽하게 신비스러운 남자주인공으로 화려하게 등극했다. 이로서 실비아 플라스와 테드 휴즈의 스토리는 <잠자는 숲속의 미녀>에서 <푸른 수염>까지, 운명의 사랑 이야기에서 잔혹극까지를 아우르는 원형적 서사의 매혹을 완성하게 된 셈이다.

이러한 실비아 플라스의 신화적 위상이 그녀의 죽음, 특히 “자살”이라는 죽음의 형태로 완벽하게 완성되었다는 점 또한 주목할 만 하다. 영원한 죽음에 대한 매혹, 미학적 자기 파괴 욕망의 완벽한 현현이라는 점에서 실비아 플라스의 자살은 어마어마한 컬트를 불러일으켰다. <자살의 연구>의 저자 A. 알바레즈의 표현을 빌면, 그것은 “시인을 하나의 희생 제물로 보는 신화”의 전통에 서 있다. 말하자면 뮤즈의 손에 의해 갖가지 괴로움을 거친 뒤 그 최후의 제단으로 끌려가 자신의 예술을 위해 스스로를 바치는 신화 말이다. 이렇게 보면 자살 자체가 그녀의 시를 확인시켜 주고 흥미를 더해주고 그녀의 진지함을 입증해주는 궁극적 행위가 된다. 실비아 플라스의 시와 삶 모두가 ‘죽음’의 형식에 의해 규정되는 결과가 발생한 셈이다. 게다가 이 죽음의 형식 덕분에, 존 키이츠나 토머스 채터튼에게 씌워진 불행하게 요절한 천재 시인의 면류관이 실비아 플라스의 이름에 똑같이 낭만적인 아우라를 둘러 주었다. 실비아 플라스를 시의 제단에 몸을 바친 ‘낭만적’ 시인의 원형으로 비치게 하는 디테일들은 자살 이외에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예컨대 그녀는 테드 휴즈와 헤어진 후 자살을 감행하기 직전까지 몇 달 동안, 마음속에 품고 있던 시의 원자들이 융합해 폭발을 일으킨 것처럼 무시무시한 기세로 시를 썼다. 그 결과는 가히 존 키이츠의 ‘기적의 해’에 비견할 만 했다. 실비아 플라스가 이 시를 써낸 환경 또한 신화적인 이미지로 각인되어 마땅하다. 집안일에 시달리던 그녀는, 낮에는 평범한 일상에 시달리는 주부로 살아가다가 새벽 네 시에 잠을 깨어 일상이 시작되기 전까지 신들린 듯 글을 써댔다. 한 달 동안 무려 서른 편. “새벽 네 시경, 아기 울음소리도 아직, 우유병을 정리하는 우유 배달부의 유리 음악도 아직 시작되기 이전, 여전히 푸르스름한, 영원에 가까운 그 시각에 씌어진” <에어리얼Ariel>의 신들린 듯한 시들은, 시인이 상상력과 ‘영감’에 반응해 온몸으로 울어제끼는 리라와 같은, 시인의 ‘영매’적 자질을 상찬한 낭만주의적 이상의 신화와 꼭 맞아 떨어졌다. 이 시들은 분명 걸작이었다. 그러나 이 시들을 확인하고 입증한 최후의 절차는 바로 그녀의 자살이었다.

자아, 이렇게 실비아 플라스의 삶과 죽음과 작품은 겹겹의 신화로 완벽하게 덧칠되었다. 순교와 희생의 이미지로 점철된 그 신화들의 위력은 가히 강력한 것이었다. 테드 휴즈가 조롱조로 “플라시아나Plathiana"라고 불렀던 그녀의 컬트적 매혹은 ”죽은 영화 스타와 같은 음침한 섹스어필“을 지니고 있었다. 실제로 어떤 면에서 본다면 전세계의 대중들에게 실비아 플라스의 신화는 마릴린 먼로나 제임스 딘의 신화와 비슷한 맥락에서 소비되었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그러나 실비아 플라스를 뒤덮은 이 신화들은 매혹적이고 강렬한 만큼이나, 세상의 모든 ‘신화’가 그러하듯 일방적이고 왜곡되고 폭압적이며, 또한 허구적이었을지 모른다. 총체적이고 삼차원적인 진실 그 자체보다는 그 진실을 읽(고 싶어하)는 여러 가지 다양한 시각들에 대해 더 많은 걸 알려준다는 의미에서 진정 ‘신화’다운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거대한 소용돌이 같은 죽음과 순교의 신화화 과정에서 상실된 것은, 바로 어머니였고 아내였고 또 투쟁하는 생활인이었던 자연인 실비아 플라스의 피와 살이 덧붙여진 개별성과 인간성이기 때문에. 신화 속에 부재하는 것은 바로 실비아 플라스 자신의 육성이요, 삶이요, 자아이므로.



역자해설: 신화를 극복하는 육성, 공감의 접점을 찾아(2)

이러한 맥락에서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는 아주 특별한 기록이 될 수밖에 없다. 천재시인들의 사생활에 숨어 있는 비밀스런 멜로드라마에 매혹되는 대중에게도, 가부장제에 희생된 여성 시인의 흔적을 찾으려는 사람들에게도, 플라스의 시학을 연구하는 비평가들에게도, 이 사적이고 내밀한 한 여성의 사적 기록은 저항할 수 없는 매혹을 지니고 있다. 그리하여 1986년 플라스 작품의 판권을 지닌 테드 휴즈가 프랜시스 매컬로우와 공동편집해 ‘일기’라는 사적 기록을 책으로 출판하게 된 일은, 실비아 플라스의 경우 대중과 학계에 모두에 있어 하나의 문학적 ‘사건’이었다. 결국 플라스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누가 뭐래도, 어쨌든 애초부터 문학적일 뿐 아니라 지극히 사적인 성격의 것이었고, 작품을 주목하면서도 늘 그녀의 삶, 그녀라는 인간 자체에게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심은 단순한 대중적 관음주의나 가십 취향을 넘어서 플라스의 작품 성향을 비평적으로 이해하는 해석 행위에 있어서도 역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플라스에게 있어 궁극의 소재이자 주제는 그녀 자신의 삶, 즉 지독하게 주관적인 그녀만의 시선으로 재해석된 세계였고,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언제나 근본적으로 자전적인 작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일기들에서 만나게 되는 실비아 플라스의 육성과 그녀의 “진실”이, 그녀를 둘러싼 신화들에서 그려진 창백한 희생자의 초상을 생각하고 읽어 내려가다 보면 그만 깜짝 놀라버리게 될 정도로, 역동적이고 다면적이고 발칙하고 냉철하고 잔혹할 정도로 정직하며 또한 자기모순에 가득 차 있다는 점일 것이다. 요컨대 독자가 처음에 어떤 종류의 관심을 가지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든 간에, 실비아 플라스의 육성은 자기도 모르게 독자를 사로잡아 버리는 흔치 않은 힘을 지닌 대단히 강력한 내러티브라는 말이다. 그 강력한 내러티브의 리얼리티 속에서 다시 부활하는 인간 실비아 플라스는, 그 어떤 신화도 포착해내지 못한, 결코 포착해 낼 수 없는, 복잡다단하고 입체적이며 통절한 ‘사람’이고 말이다. 따라서 자신의 성적 매력에 눈을 뜨기 시작하는 아름다운 사춘기 소녀의 치기 어린 감상이나 발칙한 욕망에서부터 시작해서, 일기의 끝부분에 이르러 타인을 냉철하고도 예리한 시각으로 해부하는 데번에서의 성숙하고 어른스러운 인물묘사와 날카롭고 어른다운 통찰에 이르기까지, 이 일기라는 파편적 기록이 추적하고 재현하는 인간 실비아 플라스의 삶은, 속속들이 뼛속까지 “인간적”이요, 그 “인간적”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모든 역설을 체화하고 있어서 독자는 어쨌든 그 삶에 대해 성찰하고 그에 대해 정서적으로 반응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진정 훌륭한 소설에 온 가슴으로 반응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실화라는 점은 아이러니컬하기는 하지만.

예를 들어 보자. 마치 콜드웰의 단편 “딸기의 계절The Strawberry Season”을 연상시키는 한 일화에서, 그녀는 성적 매력이 바야흐로 꽃피기 시작하는 사춘기, 자신의 여성성을 경계와 감시의 시선으로 지켜보는 사람들, 그리고 그 속에서 마주친 짧고 폭력적인 성적 경험을 그려내고 있다. 자신의 여성적 성욕을 만끽하면서도 수치스럽게 인식하고, 타인들의 비판적 시선에 움츠러드는가 하면 당돌한 반감을 가지는, 50년대의 이중적 성 모럴과 그에 눈뜨는 결정적 사건, 그리고 그러한 사건 전체를 재현함에 있어 멜로드라마적 클리쉐의 틀 속에 끼워 넣고 또한 그 클리쉐를 뛰어넘는 십대 소녀의 복잡다단한 반응은, 훗날 꽃피게 될 전형적인 플라스의 작품 세계를 예시한다. 자신의 내면과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대해 가차 없이 메스를 들이대는 그녀의 매서운 시적 상상력은 단차원의 현실 인식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중성과 모순, 역설은 플라스 그 자체였다. 삶에 대한 눈부신 매혹과 동시에 끝없는 자기 파괴의 충동, 아름다운 육체와 그 힘에 대한 허영기 넘친 자각, 그런가 하면 육체의 성적 본능에 대한 청교도적 증오, 시의 가장 순수한 본질에 대한 믿음, 또 한편으로는 잡지에 시를 게재하고 출판하는 일에 강박적으로 매달리는 속물스러운 성공에 대한 갈망, 온갖 대중적인 야망에 대한 냉소적인 무시, 엄청난 자존심 한켠으로 이상과 욕망과 기대에 못 미쳐 허우적거리는 절망, 남성에 대한 끝없는 매혹과 지독한 의존성, 그 이면에는 그들의 영향력에서 탈피해 독립적인 자아를 주장하고자 하는 증오에 가까운 절박한 욕구. 결혼과 행복한 가정생활에 대해 이상적인 꿈을 버리지 못하면서도, 사회적 야망과 시로 자신의 존재를 표현하고 싶다는 욕구에 짓눌리는 이중성. 이 일기들에서 실비아 플라스는 수많은 가면을 덮어쓰고, 위장과 거짓 자아를 꾸며내는가 하면, 솔직하다 못해 징그럽게까지 느껴지는 발칙한 정직함을 - 이 신랄한 정직함 (혹은 과장스럽게 부풀려진 냉소적 증오) 때문에 사후 플라스의 가까운 사람들은 심한 상처를 받기도 했다 - 의기양양하게 과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숱한 가면들 속에서, 기이할 정도의 진정성이 탄생한다. 그리고 그 진정성으로 인해, 우리는 이 일기들에 대해 방관자적인 자세를 견지하기가 힘들어진다.

따라서 이 일기들을 읽어나가는 건 가끔씩 정말로 고통스럽다. 그녀는 냉혹할 정도로 정직했고, 그 적나라한 솔직함과 무서운 신랄함 때문에 이 일기들에서 드러나는 실비아 플라스는 결코 쉽게 정을 붙일 만한 사람이 아니다. 어쩌면 독자들은 이 일기 속에 드러나는 플라스의 치사하고 범속한 욕망들에 당혹감을 느낄 수도 있으리라. 모순 덩어리의 끔찍스러운 이기주의자. 끝내 소통과 공감에 실패하고 악에 받친 외로운 모래알. 심지어 폭력적으로까지 드러나는 자기혐오와 타자에 대한 공격성. 하지만 결국 그러한 치부는 실비아만의 것이 아니요, 결국 우리 모두가 직시할 용기가 없었던 치부에 잇닿아 있다. 그러니 우리가 느끼는 고통은 바로 그 직시의 고통일지 모른다.

결국 독자들은 책장을 덮으며 페미니즘의 순교자를 만나거나 나와는 상관없는 거대한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을 만나게 되는 게 아니라, 우리네 삶이 그러하듯 눈부신 순간들도 있었지만, 때로는 추하고 때로는 불쌍하고 때로는 표독스럽던, 그러면서도 끝없이 ‘도와달라“고 손을 뻗쳤던 한 “사람”의 너무나 사람다운 인생에 연민과 공감을 느낄 수밖에 없게 되어 버린다. 어쩔 수 없이 천천히 파국을 향해 달려가는 열차에 타고 죽음을 향한 질주를 무기력하게 바라보는 것과 같은 서글픈 페이소스에 젖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결국은 그녀의 말대로, “하나님, 이것이 전부인가요? 웃음과 눈물의 회랑 한가운데를 쏜살같이 스쳐 달리는 것이? 자기 숭배와 자기혐오, 영예와 오욕 사이를 이렇게 위험하게 질주하는 것이?”라고 되묻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일기들을 읽으며 결국 우리네 삶의 조건들을 성찰하게 되고, 그로서 그녀가 맞닥뜨렸던 문제, 그녀의 고민에 대한 성찰이 보편적 인간적 (여성적) 경험의 진실과 맞닿는 순간, 플라스라는 특수한 개인의 고뇌가 독자의 가슴을 진정한 이해와 공감으로 열어젖히는 순간, 어쩌면 그녀를 둘러싼 평면적 신화들, 불건강한 관음주의를 극복할 길이 열리는지 모른다.

이 일기장들을 넘기다 보면 절실히 다가오는 것은, 어찌 보면 그녀의 비범함 만큼이나 그녀의 평범함이다. 플라스는 버지니아 울프의 “작가의 일기”를 읽고, <하퍼스> 지에 원고가 실리지 못해 우울한 마음을 달래려고 요리를 하는 작가의 모습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잡지에 보낸 시가 반송되지 않을까, 원고 수락 편지가 오지 않을까, 하루 종일 유리창에 매달려 우체부를 강박적으로 기다리는 플라스의 평범한, 너무나 평범한 모습에 매료된다. 유리창에서 눈발 속으로 걸어가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며 한없는 행복을 느끼는 그녀의 모습에 매료된다. 코를 파는 희열을 논하는 의외의 재기와 유머감각에 매료된다.

하지만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가 범인(凡人)들의 소소한 일상기록과 결정적으로 갈라지는 지점은 아마, 일기 전편을 지배하는 "시“에 대한 강박적 헌신에 있으리라. 이 일기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나듯이, 실비아의 온 존재를 지배한 것은, 시로서 자신을 표현하고 시로서 자아를 완성하고 시로서 명성과 불멸을 쟁취하고자 하는 부단하고도 일관된 욕망이었다. 그리고 이 욕망 만큼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이 욕망 이외의 모든 것이, 심지어 삶과 생활마저도 부차적인 문제로 치부되었다. 결혼 전, 그녀의 삶에서 중요한 문제는, 수많은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사랑’이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냉소적인 태도나 치기어린 낭만적 이상으로 점철된 사랑‘들’은 일기 속에 드러나는 플라스의 경험들이 대개 그러하듯 언제나 글쓰기를 위한 ‘소재’의 발굴을 위한 실험 같은 느낌이 들곤 한다. 그러다가 결혼을 하게 되면서부터는, 스스로 위대한 시인이라 믿었던 남편의 그늘을 벗어나 주체적인 정신세계를 구축하는 일에 온 몸과 마음을 바쳐 매달렸다. 글을 쓰지 못한다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 죽음이나 마찬가지였고, 항상 그녀는 끊임없이 글쓰기에 온 존재를 투영할 수 있는 그 어떤 시간, 그 어떤 조건을 갈구하고 있었다. 강의를 그만두어야지, 육아에 이렇게 매달리지 말아야지, 이번 여름에는 책을 얼마쯤 읽어야지...마치 자기계발 지침서처럼 이어지는 ‘좋은 시’를 쓰기 위한 수많은 다짐들. 할 일은 너무나 많고, 쓸 것은 너무나 많은데, 시간은 너무나 짧고...”인생은 흘러간다. 그녀의 삶이.“ 그러나 ‘시’를 위한 온전한 시간은 현실과 일상에 뒤채어 영영 주어지지 않았고, 그녀는 죽음에 가까워져서야 ‘푸르른 영원에 가까운 새벽’에 ‘시’와 존재의 순수한 접점을 발견했고 그 접점에 온 존재를 쏟아 부었다.

그렇다면 어쩌면 말 그대로 실비아 플라스는 정말 시를 위해 삶을 희생했는지도 모르겠다. 테드 휴즈마저도, 이 일기의 본질은, 그녀가 ‘연금술’처럼 마음의 불순물을 정제해나가 ‘참된 자아’의 목소리를 찾아내는 탐구의 과정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과연 시란 것이, 그럴 가치가 있었던 것이었을까? 나는 모른다. 정말로 모르겠다. 하지만 그 질문 자체가 시의 의미를 참으로 경시하는 우리 시대에 던져주는 물음의 반향만큼은 너무나도 크다. 본책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 마지막을 장식하는 플라스의 일갈은 읽는 이의 가슴을 뜨끈하게 만든다. 아니, 섬칫 시리게 만든다. “저는 생애 최고의 시들을 쓰고 있어요. 이 시들로 인해 저는 유명해질 거예요”라고. 그녀가 헨리 제임스의 작품을 읽으며 죽은 그에게 해주고 싶었다던 말을 나는 오돌 오돌 떨며 차가운 세상을 떠난 그녀에게 해주고 싶다. 그녀가 죽음 뒤에 이룩한 성공을 말해주고 마음을 도닥거려주고 싶다. 그대는 결국 불멸을 성취했노라고. 그렇다면 그녀의 삶은 다시금 범속을 초월해 신화에 한 발 가까워지나.

역자해설: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3)

20세기가 끝나고 21세기가 시작하던 무렵, 실비아 플라스는 또 다시 문학계의 지축을 뒤흔드는 화두로 대두된다. 실비아 플라스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는 1998년, 테드 휴즈의 시집 <생일 편지>가 출간되면서부터 새삼스럽게 재개되었다. 플라스 사망 이후, 휴즈는 그들의 삶 일체에 대해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이 책의 ‘서언’에서 그는 당시 “망각”은 “생존의 필수조건”이었다고 짤막하게 스쳐 지나가는 말처럼, 그러한 침묵의 고통스러운 심리적 배경을 얼핏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휴즈는 실비아의 죽음에 대해서 그 이상 어떤 논평도 하지 않았으며, 마녀사냥에 가까운 페미니스트들의 맹렬한 집중포화 속에서도 전혀 스스로를 방어하거나 변호하려 들지 않고 스토익한 무심으로 일관했다. 그러다가 1998년, 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혹독할 정도로 냉정하고 예리한 특유의 화법을 버리고, 죽어버린 아내와의 삶과 사랑을 놀랄 만큼 사적으로 토로하는 88편의 시를 출간했다. 아름답고 고통스럽고 서정적인 시집 <생일편지Birthday Letters>는 문학계에 강렬한 파문을 던진 충격적 사건이었다. <생일편지>는 당장 장기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을 뿐 아니라, 윗브레드Wheatbread와 포워드Forward 등 유력한 문학상을 모조리 휩쓸었다. 이 시집 속에서 테드 휴즈는 냉혈한이며 유능한 살인자의 오명을 써왔던 자신이 실비아 플라스의 죽음을 알바트로스의 시체처럼 무겁게 지니고 살아왔음을 고백했고, 아내를 향해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무기력하게 바라보고 서서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한 통한을 술회했다. 테드 휴즈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또 한번 두 사람의 문학과 삶에 대한 논란으로 세상이 떠들썩해졌으며, 플라스와 휴즈를 바라보던 단선적 시각은 조금쯤 허물어지는 듯 했다.

그런가 하면 2000년에는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가 발췌되지 않은 채로 세상에 다시 한 번 출간되어 초판 16000부가 하루 만에 팔려나가는 대성공을 거두어, 실비아 플라스의 대중적 매혹이 아직도 빛바래지 않았음을 입증했다. 본책의 원본인 1986년판 <일기>는 맥컬로우가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 프랜시스 맥컬로우와 테드 휴즈가 임의로 원고의 3분의 2 분량을 생략하고 편집한 판본이다. ‘생존한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지 않기 위해’ 지나치게 과격하거나 심한 표현은 싣지 않겠다는 것이 편집의 원칙이었다. 덕분에 이 판본은 감질 나는 ‘생략’ 문구가 중간 중간 들어 있는 기묘하게 파편적인 텍스트가 되었다. 그 검열의 흔적은 물론이고 편집자 맥컬로우의 서문, 묘하게 냉담하면서도 정서적으로 깊이 연루되어 있는 테드 휴즈의 서언까지 합쳐 결과적으로 이 판본은 상당히 흥미진진하고 증후적인 텍스트로서 대단히 의미심장해졌다.

아무튼 테드 휴즈는 이 일기를 검열하고 생략했다는 이유로, 평생에 걸쳐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자신과 관련된 지문들을 삭제했을 뿐 아니라, 결정적으로 실비아의 죽음에 대한 개인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실비아 플라스의 마지막 일기 한 권을 파기했다고 스스로 밝혔기 때문이었다. 망각이 생존의 조건이었다는 게 그의 변이었다. 하지만 휴즈는 결국 세상을 떠나기 전, 스미스 대학에 보관한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 원고 전체를 가감 없이 출판하는 데 동의했고, 그로 인해 2000년 <완판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The Unabridged Journals of Sylvia Plath>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완판본에서도, 기대와 달리 대단히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지는 않았다. 테드 휴즈를 “캠브리지 최고의 유혹자”라고 부른 부분이라든가, 냉소적으로 테드의 허영기를 꼬집으면서 “그의 시집이 다음에 누구한테 헌정될지 누가 알랴. 자기의 페니스?”라고 쓴 부분들이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사라진 일기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계속된다.

그리고 최근 다시 실비아 플라스의 신화가 재삼 첨예한 화두로 대두된 것은 바로 대중의 촉각에 민감한 영화계의 움직임 때문이었다. 테드 휴즈가 세상을 떠나고 나자, 두 사람의 스토리에 눈독을 들여온 헐리우드의 영화사들이 앞다투어 영화화 계획을 발표하고 나섰다. 휴즈와 플라스는 생전에 헐리우드의 접근을 극도로 꺼렸다. 하지만 결국 2003년, 영국의 BBC는 미국자본과 손을 잡고 미국의 스타 기네스 팰트로우를 캐스팅해 두 사람에 대한 영화를 찍기 시작한다. 그러나 딸인 시인 프리다 휴즈는 이에 발끈해, 시로 분노한 심경을 토로함으로써 BBC를 정면으로 공격하고 나섰다.

“이제 그들은 영화를 만들고 싶어한다/
아이들을 고아로 만들면서/
오븐 속에 머리를 처박은, 시체를/
상상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땅콩을 주워 먹으면서/
내 어머니의 죽음을 보고 즐긴 사람들은/
그녀의 추억을 각자 하나씩 들고 집으로 가겠지/
생명이 없는 - 기념품/
아마 그들은 비디오를 살지도 모른다/

Now they want to make a film
For anyone lacking the ability
To imagine the body, head in oven
Orphaning children.

The peanut eaters, entertained
At my mother's death, will go home,
Each carrying their memory of her,
Lifeless - a souvenir.
Maybe they'll buy the video.

결국 프리다가 무엇보다 견딜 수 없어하는 것은, 바로 실체를 무시한 실비아 플라스의 신화가 그녀를 ‘자살 인형’의 생명 없는 페티쉬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만들어낸 ‘그들의 괴물’이다.

그들은 내가 내 어머니의 말들을 순순히 내놓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들이 만들어낸 괴물의 주둥아리를 채우기 위해/
그들의 자살인형 실비아라는 괴물.

They think I should give them my mother's words
To fill the mouth of their monster
Their Sylvia Suicide Doll."

그렇다. 실비아 플라스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고, 그녀의 신화는 여전히 강력한 매혹을 발산하고 있다. 그러나 독자 앞에는 선택이 남아 있다. 그녀의 신화를 ‘자살 인형’의 페티쉬로 일회용으로 소비할 것인가, 복잡다단하고 입체적이고 치열했던, 살아있던 ‘사람’이자 시인으로서 그 모든 이중성과 모순을 부여안고서 공감하고 이해하고 연민할 것인가.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가 전해주는 실비아의 육성은, 무엇보다 독자의 그 선택이 내포한 중차대한 의미를 절실하게 주장하고 있다